<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그녀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과는 다른 결의 소설이다. 사랑의 아픔을 진한 농도의 문장으로 담아냈던 강렬함과 달리 <남자의 자리>는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강렬함보다는 덤덤함이, 하소연하듯 쏟아내던 문장보다는 짧고 간결한 회상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열정>처럼 자전적 이야기이며 사랑을 다루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일 뿐이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당신이 그의 일생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무엇을 적게 될까? 혹은 어떤 방식으로 그 삶을 표현하려 할까?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어쩌면 그 답안에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그래, 다음에 보면 되지.” 그는 내색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순간부터 그의 탄생과 젊은 시절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딸의 입장에서 듣고, 엿보고, 전해 들었을 법한 사연들을 이 작가는 짧고 간결하지만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담아낸다.
제목에 대해서는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원제는 <La place>로 ‘자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 번역서 제목이 <A Man’s Place>로 옮겨지면서 <남자의 자리>가 되었다. 번역가는 더 좋은 제목이 뭐였을지 여전히 고민이라고 적었는데, 이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 때문에 초반에는 거부감이 심했다. 마치 고된 가장의 이미지가 ‘남자’의 자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반에 등장한 이 대목은 그런 오해를 가중시켰다.
남편이 저녁에 도착했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을 한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에 불편해 보였다. 그에게는 그곳이 어느 때보다 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집에 하나뿐인 2인용 침대에서 잤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 침대다.
이 책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기 아버지의 생을 글로서 흔적을 남기려 했던 결과물 같다. 그래서 소설이라고 분류는 되겠지만,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 정제되고 고심했으며 천천히 기록한 것들을 담아냈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아버지의 삶을 미화했다거나 꾸며냈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부모 세대에 대한 몰이해는 나이가 들고 내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다. 동시에 성장기에 강렬했던 충돌의 기억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아니 에르노는 그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 최대한 기록자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려 한 것 같다.
초중반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가와 문화를 뛰어넘는 부모 세대의 공통 면모를 담고 있다.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로 이해가 안 되는 내용도 있지만 말이다.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고, 삶과 결혼 또한 순탄치는 않았던 윗세대의 모습은 빤한 레퍼토리 같았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별로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이 빛을 발하는 건 중반 이후, 그러니까 아니 에르노가 간접적으로 접한 아버지의 사연이 아닌 직접 경험한 아버지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이 노련한 작가의 세상과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시선이 문장에 잘 배어든다.
그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앞에서 뻣뻣해지고 소심해졌으며,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영리하게 처신했다. 이 경우 열등함을 인식하되 그것을 최대한 숨기면서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못 배우고 교양이 부족한 중년 남자에 대해,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저렇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식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선으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거리감은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책 속에서 아버지는 ‘그’로 표현된다. 어머니는 그대로 ‘어머니’ 임에도 불구하고.
이 의도적인 거리감은 책의 묘한 리듬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러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듯한 서술 방식은 작가가 아버지의 삶에서 기억하려고 했던 것, 기억하고 싶었던 것, 그리고 꼭 적어야만 했던 것을 선별하여 나열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기술하는 방식과 덤덤하게 적은 글의 리듬을 이해해야만 매력적으로 와닿는다. 만약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그저 고지식한 부모 세대의 사연팔이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책의 내용은 평이하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접한 뒤, 그 인물의 탄생부터 말미까지를 서술해 나간 방식이다. 다만 그 인물이 나의 아버지일 경우 나는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너무도 가깝고도 너무도 많은 감정이 덧대어진 가족의 삶에 대해 나는 무엇을 쓰려고 할까. 그 고민을 해본다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가 왜 1984년 프랑스에서 르노도 상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서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거나, 아버지의 생을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는 그저 그런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보다 좋았으며, 그녀가 왜 좋은 작가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니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