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 가와우치 아리오
가와우치 아리오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처음 펼쳤을 때는 책의 장르를 착각했다. 제목만 이렇지 실제로는 미술의 역사나 종류를 소개하는 일종의 교양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히 안내하는 미술서. 그런데 웬걸, 책을 읽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목 그대로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보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게 가능하다고?
저자는 전맹(시력이 0으로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시각장애) 미술 관람자인 시라토리 겐지와 미술관을 둘러본 경험담을 책으로 엮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미술 관람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과연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일까? 이런 질문들이 무색하게 이걸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 쪽이었다. 그는 미술관 측의 안내원, 혹은 자신의 친구를 따라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설명해 주는 작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긴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데,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거나, 평소 관람 때와는 다르게 세세하게 살펴보면서 미술에 대한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설명을 듣는 시라토리 겐지는 적절한 질문을 통해 작품에 대해 유추해 간다. 같은 작품을 두고도 여러 사람의 해석과 설명이 다른 것을 재미있어한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한 번도 눈이 보이는 세계를 체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혼자서 외출을 하고, 장을 보고, 술을 마실 정도로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감각의 세게를 다른 사람을 통해 체험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과 주관, 그리고 표현력에 따라 보여주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감에도 여러 갈래로 갈린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그 과정이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시각장애인과 미술관을 가는 이 행위가 독서 모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이 모여도 각자 주목한 부분이 다르고, 그것을 해석한 방법도 다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용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느낀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이 더욱 또렷해지는 경험을 한다. 시각장애인인 시라토리 겐지에게 여러 사람이 미술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은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했다. 다만 그 안에 들어간 시라토리 겐지는 책을 읽지 않고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렇게 참여해 보면 안다. 남들의 책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그렇게 독서모임과 같은 행위라고 이해를 하고 나자 이들이 왜 함께 미술관에 가는 것을 즐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독서모임도, 시각장애인과 미술관에 가는 것도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책은 단순하게 시각장애인과의 미술관 체험기만을 적지는 않았다. 눈이 보인다는 것의 의미,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일본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예술의 형태들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썼다. 사실상 일반인이 쓴 체험기 혹은 에세이처럼 편하고 쉽게 읽히기 때문에 접근성은 좋지만, 반대로 글맛을 추구하는 독자에게는 조금 아쉬운 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문장이 아니라 체험이다. 단점을 감수하고서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스윙의 모토 중에는 ‘아슬아슬한 탈선을 하자’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업무 시작 시간은 제각각 다르고, 졸리면 낮잠 자기를 장려하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휴가를 쓰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 내면에 똬리를 튼 빡빡한 규범의 바깥으로 용기 내어 한 발 나가 자기 규제를 해제하면, 예전에는 탈선이었던 일들이 조금씩 허용 범위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보통’과 ‘정상’과 ‘당연’의 영역이, 다르게 표현해 ‘편안한 삶’의 폭이 넓어진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NPO 법인 스윙에서 진행하는 교토인력교통안내였다. 장애인 시설에 다니는 장애인 중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교토의 버스 노선을 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 역할을 맡긴 것이다. 외국인부터 고령자까지 대면으로 길을 안내하는 행위는 인기를 얻었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편입되는 성공적인 사례였다. 이렇듯 책에는 장애인과의 공생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들도 소개된다. 물론 좋은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확인 민폐 물체’라고 적힌 챕터처럼 우리보다 나은 일본이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들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이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장애인과 소통하고, 장애인과 교류하는 것을 뛰어넘어 장애인과의 공존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담긴 책이다. 이는 시라토리 겐지와의 동행에서 시작된 사고의 확장이다. 이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이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 총 432페이지에 달하는 조금 두꺼운 책이지만 술술 읽힌다.
책에는 흥미로운 질문도 등장한다. 시라토리 겐지 씨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신의 아이가 장애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 출산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느 정도 우생학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다. 또한 호시노 씨는 일반인의 시각장애인 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비치는데, 이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소수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를 공격하는 장면도 많이 목격했다. 인종차별에 무척 민감하면서 젠더 문제와 성적 소수자 차별에는 둔감한 사람도 있었다. 얼핏 어떤 차별도 하지 않는 열린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신과 다른 속성을 지닌 타인에게 무관심할 뿐인 사람도 있었다. 차별과 편견을 나타내는 지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처럼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 차별과 우생 사상을 거부해야 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미술관에 가는 것은 미술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이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이 되는 행위인 것 같다.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두 종류의 인간이 교류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이 기묘한 체험은 잘 정돈된 사진과 챕터로 소개되는데, 그중에는 한국인이 등장하는 내용도 있다. 책을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다양성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