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지능이다> - 자밀 자키
스탠퍼드대 심리학 교수인 자밀 자키의 <공감은 지능이다>는 제목에서 독자들의 오해를 사기 쉽다. 이는 마치 지능이 높을수록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반대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지능이 낮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는 전혀 다르다. <The War for Kindness>. 한국어로 친절함 혹은 상냥함을 위한 전쟁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책을 출간한 한국 출판사에서 제목을 <공감은 지능이다>로 바꿨다.
물론 이 제목이 책의 내용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도 EQ로 알려졌던 감정 지능이란 개념을 설명하면서, IQ에 해당하는 지능처럼 이들이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바뀔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는 공감이 선천적인 것이냐 후천적인 것이냐는 저자의 질문과 함께 공감은 키울 수 있는 것이라는 서문의 핵심 내용으로 이어진다. 즉, 공감 능력은 지능처럼 일정 부분 키울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한 방법과 사회에 적용할 방법에 대해 고민한 것이 오늘 소개할 책, <공감은 지능이다>이다.
이 책에는 다소 흥미로운 내용과 다소 무리한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
일단 저자는 공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분화하여 정의한다. 공감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몇 가지 방식을 말하는데,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인지하는 인지적 공감과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정서적 공감,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개선하고 싶은 공감적 배려다. 즉, 저자는 상대의 감정을 인지하고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결과로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것까지 공감의 범주에 넣어버렸다. 보통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의 개념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런데 공감적 배려라고 칭한 ‘행동하고 싶은 마음’까지 넣은 것은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와도 연관이 있다.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은 2019년으로 트럼프 1기가 시작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다. 이미 미국은 책에도 언급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 운동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미국을 경험하고 있었다. 저자가 ‘우리는 더 친절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를 프롤로그의 제목을 정한 것도, 6장에서 미국의 경찰이 공감을 찾기를 희망하며 진행한 새로운 시도에 대해 길게 적은 것도 분열된 미국에 공감과 연대의 씨앗을 퍼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내용도 있지만, 배경과 거리를 두고 책을 보면 쓸데없는 분량 혹은 사족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책의 의도는 다분하지만, 평소 공감에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장과 4장의 내용이 그러했는데, 3장에서 저자는 극단주의자들의 증오를 줄이는 방법으로 ‘접촉’을 언급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경계가 나뉜 인간 집단은 서로 공감하지 못하고 갈등과 증오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학에서 ‘접촉이론(contact theory)’라고 정립된 개념을 언급하며,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의 주장대로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자신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즉,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접촉이 그들 사이의 편견과 증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공감하면서 작년에 보았던 한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사상 검증 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정치 성향의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은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예능을 표방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실험이었다. 책에서 언급한 저 ‘접촉 이론’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과 편견을 줄일 수 있는가.
반대로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현대에 들어 점점 더 심해지는 갈등의 양극화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는 음식을 주문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도 사람과 마주칠 일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혹시 이런 디지털 시대의 변화가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리어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4장 역시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문학과 예술이 공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연기가 공감 발달에 도움이 되는가, 문학작품이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도 흥미로웠지만, 챕터 마지막에 등장한 범죄자를 위한 독서 모임이 가져다준 영향도 아주 흥미로웠다. 하지만 책의 주장들이 명확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관련한 연구가 아직 충분치 않아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었는데, 자세한 건 책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여러 질문 중 하나가 공감이 현대인에게 필수 항목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공감이 중요하고 인류의 문명 발전과 함께 공감의 영역도 확산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과거에 수렵 채집 시절 인간은 그 지역의 먹을거리를 전부 먹어 치우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때 제때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들은 그냥 포기했다. 늙거나 부상을 입어 속도가 느린 사람을 챙기다가는 그 집단이 전부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뒤처진 이들은 알아서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그들이 생존해 돌아오면 환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집단을 탓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충분한 식량 생산 능력과 안정적인 사회 기반을 갖추면서 과거와 달리 챙기고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도 늘어났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현대에 들어 중요해진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몇몇 책들의 주장처럼, 달라진 인간 사회에 맞춰 더욱 확장된 공감 능력이 필요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책에도 적혀있듯이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면 인간의 공감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는데, 그 빠른 과정에서 일종의 피로감이 온 것은 아닐까. 이제는 한 사람의 성별을 체크하는 데만도 7개 혹은 그 이상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한 사회 안에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언어뿐 아니라 행동양식과 사고방식도 다르다. 그런데 현대가 되면서 점점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수위는 높아져 간다. 소위 PC라고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 거기에 공감뿐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친절함까지 요구하는 사회가 되면서 일종의 과부하가 걸린 것은 아닌가 싶다. 다양성의 시대는 다르게 말하면 내가 이해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린 사람들이 단순함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양끝의 극단으로 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5장에서도 지나친 공감의 위험에 대해 언급한다. 물론 책은 일의 영역에 공감이 필요한 직종들이 번아웃되고 있는 현상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공감이 필요한 직업의 사람들이 도리어 공감적 태도에서 멀어지는 현상은 지나친 공감이 인간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의 공감 강조,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친절함의 강조가 혹시 과부하와 반발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공감의 필요성에서 더 나아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공감과 연대를 형성해 나가는 노하우를 익혀야 하는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책을 쓴 저자는 분열된 미국 사회를 수습하고픈 마음에 공감과 친절을 강조하는 데 급급했지만, 나는 한편으로 공감의 확산은 중요하나 개개인의 상황에 맞춘 강도 조절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의 올바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 다 공감해야 하고, 그 공감의 대상은 끝도 없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 F의 공감 방식만이 옳고, T의 방식은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기류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처럼, 무조건적인 공감과 친절함을 강조하는 기류에 역효과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아마도 이 책의 매력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가 풀어놓은 주장들이 참 많은 이야깃거리, 생각거리를 던진다는 것. 여전히 한국 출판사가 정한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리고 저자의 의도가 담긴 몇몇 챕터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사회와 연대, 공감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하지만 절대로 혼자 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여럿이 함께 읽으면서 공감하는 내용과 그렇지 못한 내용을 다양한 시선으로 나눠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책이 가진 단점이 더욱 상쇄되지 않을까 싶다. 혹여나 그럴 여력까지 안 되는 사람이라면 노무현 재단의 ‘알릴레오 북’s’ 50회에서 이 책의 내용을 다룬 적 있는데, 그 영상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절대로 혼자 읽지 말 것. 이 책의 미래 독자에게 드리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