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름, 완주> - 김금희
대한민국 출판업계에 박정민 배우의 등장은 아주 긍정적인 사건이다. 그처럼 영향력 있는 인물이 책이라는 세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올 수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전에도 박정민 배우는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같은 책을 대중적으로 더욱 알리는 데 일조한 바 있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사랑을 넘어 출판사 설립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박정민 배우가 설립한 출판사 무제에서 내놓은 첫 번째 오디오북 <첫 여름, 완주>는 자연스럽게 업계의 입소문을 탔다.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민 배우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장애의 장벽을 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소통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에 참여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첫 여름, 완주>처럼 완성도 높은 오디오북을 만들려고 한 것도 그러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디오북을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첫 여름, 완주>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오해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김금희 작가가 쓴 소설을 오디오북으로도 따로 만든 것인 줄 알았으나 기획 단계에서부터 오디오북을 겨냥하고 작품을 쓴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소설의 형식과는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은 윌라라는 앱을 통해 오디오북으로 들을 수 있고, 나는 귀로 먼저 청취한 다음 책을 접했다.
오디오북으로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유명사의 파악이었다. 특히 인물의 이름인 ‘손열매’와 ‘어저귀’는 텍스트 없이 소리로만 들었을 때 뭐라는 건지 한 번에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가끔은 소리만으로 파악하기 힘든 내용이 있어서 낭독과 함께 화면에 텍스트가 떴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한 재생 배속을 높일 경우 일정한 속도로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거나, 어플 사용 중에 사진을 찍으면 어플이 일시 정지하는 현상 등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오디오북의 퀄리티는 높았다. 주인공 손열매를 맡은 고민시 배우가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나 감탄하는 순간도 있었고, 배성우 배우의 이장 캐릭터 해석에 놀라기도 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낭독을 맡은 유정우 님의 내레이션은 오디오북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어쩜 이렇게 모든 대사가 배우들 입에 착착 감기는 걸까 하는 점이었는데, 김금희 작가가 문장을 쓸 때 배우들과 논의하여 수정하는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했다.
그러나 이 완성도 높은 오디오북은 한편으로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형태가 맞는지, 더 나아가 오디오북이 이렇게 쓰이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요즘 시대에 사람들이 즐기는 콘텐츠의 종류는 다양하다. 각종 OTT로 접할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웹툰, 웹소설에다 유튜브의 영상과 음악까지 수두룩하다. 이런 콘텐츠들과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공백이다. 텍스트로만 구성된 책은 독자가 해석의 주도권을 가장 강하게 쥐고 있는 매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글을 읽으면서 활자가 주는 자극에 따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친다. 인물의 감정, 배경이 되는 공간의 분위기, 심지어 문장의 의미까지 자신만의 해석을 덧댄다. 그런데 그것이 오디오북의 형태가 되는 순간 해석의 여지는 사라진다. 일차적으로 낭독에 감정이 실리는 순간 낭독자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창 오디오북 시장이 시작될 때 낭독은 김영하 작가처럼 무미건조한 형태여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낭독이 원래 책이란 텍스트가 가진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첫 여름, 완주>는 애초에 시각장애인들에게 좀 더 완성도 높은 오디오북을 들려주겠다는 욕심이 있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모든 감정과 해석을 결정지어 버렸다. 그래서 솔직히 결과물은 오디오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는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독자의 해석의 주도권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평소 책의 공백을 사랑하는 사람, 내가 주도권을 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원하는 사람에게는 오디오북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식으로 오디오북의 연출이 작품에 적극 개입하면서 오해를 증폭시키기는 장면도 있었다. 초반에 등장한 정신과 상담 장면이 그러하다. 주인공 손열매가 우울증으로 심리검사를 받는 과정은 취조하는 듯한 인물의 목소리와 타이핑 소리 때문에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장면인 줄 알았다. 이는 사실 원작의 문제인데, 저자가 심리상담 장면을 마치 조사받는 것처럼 썼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도는 다른 데 있었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었을 때는 심리상담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이 생길 수 있는 장면이라 조금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오디오북을 듣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원작이 어떻게 쓰여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것은 내가 아는 소설이라기보다 드라마 대본, 혹은 희곡에 가까운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DVD나 비디오테이프처럼 종이 곽 안에 들어간 책을 직접 펼쳐보고 해소되었는데, 애초에 김금희 작가는 소설이 아니라 오디오북이란 콘셉트에 맞춰 작품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대사는 직접문으로 쓰였고, 문장보다는 인물의 대사로 진행되는 형태다. 여기서 두 번째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김금희라는 소설가에게 소설이 아닌 다른 형태의 작품을 쓰게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까? 이것이 김금희 작가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을까? 만약 시각장애인들에게도 책의 매력을, 우리가 사랑하는 소설의 매력을 느끼게 하고 싶다면, 그것은 기존의 독자들이 사랑하던 소설의 형태였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것은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작품이 기획된 의도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완성된 오디오북을 들어보면 지금 출판된 형태가 올바른 선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장애의 벽을 넘어 문학이란 세계를 시각장애인에게도 확장하고 싶다면, 기존의 소설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이미 우리가 사랑하는 문학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의 매력을 시각장애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첫 여름, 완주>의 종이책은 내가 알던 소설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어서 이것이 온전한 전달 방법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이 의문에 대한 논의는 무제의 다음 작품으로 확산될 텐데, 그 고민을 잘 담은 작품이 나오길 바란다. 장애를 넘어 문학이란 세계에서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를 나 또한 바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디오북을 떠나 소설 자체에 대해서도 감상을 남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등단 소설가에 대해 문장은 잘 쓰지만 이야기는 잘 쓰지 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데, 아쉽게도 <첫 여름, 완주>는 그 편견이 강해지는 사례에 해당했다.
소설은 주인공 손열매가 빌려준 돈 문제 때문에 완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이때 주인공이 갖고 있는 어려움은 두 가지다. 돈이 없다는 것과 심리적 문제 때문에 성우로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보통 이야기는 주인공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경우에 주인공 손열매가 어떻게 해서 문제를 극복했는지가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손열매의 돈을 떼어먹은 수미의 경우 작품 내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손열매가 서울로 상경하는 장면과 함께 등장한다. 수미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돈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열매는 수미에게 관대한 태도를 내비치는데, 이 변화가 완주에게 겪었던 일들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어서 뜬금없게 느껴진다. 애초에 수미를 어떻게 찾았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이 여전한 주인공이 돈도 갚지 않은 수미를 용서하는 모습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열매가 완도에서 생활하는 내용은 캐릭터별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갖기보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별개의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완도라는 공간에 빌런처럼 암시되었던 구회장은 그 역할이 애매모호하게 그냥 사라지고, 수미를 찾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수미 엄마도 그냥 사람 좋은 인물로만 그려진다.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은 어저귀인데, 잘생긴 젊은 남자로 그려진 어저귀에게 처음 호감을 갖지만 거리를 둔 이유는 외계인을 믿는 사차원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 거리감이 좁혀져 갑자기 관계가 진전되는 계기는 술이다. 술기운에 관계가 달라진 뒤로 급속히 가까워지지만, 사실 어저귀라는 인물에 대한 문제의식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소설은 어저귀와 손열매의 관계가 급진전될 때 어저귀를 느닷없이 퇴장시키는데, 그 방법이 세련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뜬금없기까지 하다. 과연 그런 식으로 어저귀라는 인물을 마무리해야 했을까 의문이다. 어저귀의 퇴장 이후에 수미가 서울로 올라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이 작품이 치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서사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로 그려진 손열매가 영화 <마스크>나 <길>처럼 너무 올드한 세대의 코드로 만들어졌다는 점, 완도에서의 생활이 결국 손열매라는 인물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전 남친에 의해 기회를 얻은 성우 오디션에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도 불투명하다는 점 등 소설 자체에는 맹점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이 작품은 오디오북으로 추천하고 싶은데, 생생한 낭독과 연출 덕에 작품의 단점이 많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오디오북을 또다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명 배우를 대거 등장시킨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한 번은 가능했지만 이다음에도 가능할까? 그 비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전무후무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책과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첫 여름, 완주>를 오디오북으로 들어보길 바란다. 그 매력은 작품의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정도다.
참고로 <첫 여름, 완주>의 오디오북을 끝까지 들어보면 출판사 대표의 짧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메시지까지가 책의 마무리라고 느꼈다. 오디오북을 듣게 된다면 꼭 마지막 메시지까지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