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솔직해질 결심

<어쩔 수가 없다> - 박찬욱

by 퇴근 후의 서재


언제부터인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내게 감정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영화가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헤어질 결심>이었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나는 한 번도 두 주인공에게 몰입하지 못했다. 형사로 출연했던 박해일은 강박증적인 인물로 나온다. 자기 통제가 심하고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최선을 다하는 유형이다. 이런 인물이 용의자로 잡힌 탕웨이에게 반한다. 자세가 꼿꼿하다느니, 나와 비슷한 부류라느니 하는 이유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자기 통제가 심한 인물이 사적 감정에 휘둘릴 때 일어나는 균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해일은 변함없이 차분히 자기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아내와 섹스를 하며 금슬이 좋다. 어디에도 자기 통제를 벗어난 감정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용의자를 바라보는 관음증적인 카메라만이 박해일의 속마음을 대변할 뿐이다.


박해일이 사랑에 빠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건 탕웨이가 예쁘다는 것밖에 없다. 박해일처럼 자기 정돈과 통제가 심한 인물이 단지 그것만으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일상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에겐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랑이 너무 쉽게 이뤄졌다. 형사인 그에게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독과 같았을 것이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감정에, 용의자에게 사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할 것이고 자책이 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두 번째 보았을 때는 그냥 머릿속에 입력해야 했다. 박해일은 탕웨이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였지만 가슴이 아닌 머리로 따라갔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고 하는데, 느끼지 못하고 외워야 했으므로.


어쩔 수가 없다 포스터.jpg


최신작 <어쩔 수가 없다>도 마찬가지다.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표방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설득력을 잃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 역시 나를 정서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공의 행동과 감정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병헌은 오랫동안 제지 분야에서 일해온 회사원이다. 그가 정리해고 통보를 받자 뒤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사양 산업인 제지 분야에서 이병헌이 갈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일자리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내 제거하겠다고.


이번 작품에서 박찬욱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AI와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에서 유일하게 인간인 이병헌의 모습이 그걸 말해준다. AI에 밀려 일자리가 줄어든 인간들이 몇 안 되는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미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였을 것이다. 이병헌의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쉽다. 내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저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했다는 억울함, 죽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사람이 없었다면 저 자리가 내 것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누구나 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블랙 코미디로 만들었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병헌이 보이는 감정과 행동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병헌이 자신의 경쟁자로 보이는 한 인물을 살해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살해 직후 그는 아내와의 댄스파티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찾아간다. 거기서 이병헌은 다른 젊은 남자와 춤을 추는 아내를 보고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귀가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네 안 했네, 의심을 하고 티격태격한다. 조금 전 살인을 저지른 한 인물이 보이기에는 너무나도 사소한 감정과 사건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같은 한 가장을, 자신과 똑같은 제지업에 몸을 담고 살았던 한 인간을 죽인 뒤다. 그런데 그 일은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시민의 모습으로 소시민의 웃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타이밍이 맞나? 이 흐름이 맞나? 이 감정이 맞는 거야? 나는 의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병헌이 인간적 고뇌를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이후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병헌의 아들은 어떤 사건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손예진이 전남편과 낳은 아이로 이병헌에게는 의붓아들이지만, 그는 굉장히 따뜻하고 진심 어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직전에 자신의 가족을 생각해 주던 경쟁자를 죽였음에도. 관객은 주인공의 동기와 행동에 감정 이입을 하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리고 거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의 입장에 빠져들어야 몰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병헌의 감정과 행동은 일반인으로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냥 정신없는 사이코패스 같다. 이야기의 틀만 보면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는지 알 것 같다. 주인공이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하는 인물, 자신의 가족에게 한없이 진심인 인물, 그렇기에 생계를 위해 그 어떤 경쟁자도 제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다만 그 메시지를 인물의 행동과 감정으로 잘 보여주지 못했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평이 갈릴 것이다. 감정적 몰입 없이 하나의 소동극처럼 보는 관객에게는 아무 문제 되지 않을 것이고, 주인공에 대한 공감이 중요한 관객에게는 따라가기 힘든 서사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정서적 문제를 언급하기 이전에 사실 이 이야기에는 큰 맹점이 있다. 이병헌이 취직을 하기 위해 다른 경쟁자를 제거한다는 대전제다. 이에 관객은 반대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저 사람들을 없앤다고 해서 내가 저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이 의문을 넘어설 수 있느냐에 따라서 관객의 평가는 또 갈릴 것이다. 이 맹점은 메시지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AI 시대에 일자리가 줄어든 인간이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모습. 이걸 그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짜 맞춰진 결과물이다 보니 허점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대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그것을 관객이 수긍하지 않으면 영화는 와닿지 않는다. 나는 그 점에서 이 영화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늘 그랬듯 박찬욱의 작품은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의 시점으로 보는 관객들, 영화적 표현 기법에 심취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전작 <헤어질 결심>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자신을 감금했던 사람을 찾아 복수하려는 <올드 보이>나, 자신이 사랑에 빠진 아가씨를 지키려고 했던 <아가씨>처럼 다수의 대중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병헌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이유도, 그 과정에서 보이는 그의 행동도 쉽사리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꿈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대중도 사랑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박찬욱의 시선은 자꾸만 대중의 공감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다음에는 그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1세기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