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계단> - 다카노 가즈아키
21세기 들어 추리 소설은 위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너무 많은 책에서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다루었고, CCTV와 스마트폰, 블랙박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탐정의 역할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독자와 트릭 싸움을 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비현실적이더라도 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계관을 보여주거나, 캐릭터 플레이에 치중한 추리물들이 눈에 띄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리뉴얼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13 계단>은 그런 위기에서 추리 소설이 찾아낸 하나의 방향을 보여준다. 2001년에 47회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했던 이 작품은 일본에서 발매 당시 100만 부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년도 더 지난 작품이지만 현재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추리 소설의 형식으로 사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13 계단>은 두 명의 파트너가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는 익숙한 형식을 갖고 있다. 다만 그 인물이 특이하다. 한 명은 난고 쇼지라는 47세 교도관이다. 그는 퇴직을 앞두고 한 사건의 진범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것은 사카키바라라는 사형수가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다. 사형수 사카키바라가 최근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것을 계기로 사건을 재조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난고는 의뢰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변호사를 통해 일을 맡는다. 그 과정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선택하는데, 그 파트너 또한 독특하다. 바로 자신이 근무하던 교도소에서 상해치사죄로 최근 가석방된 27세의 남성 미카미 준이치이기 때문이다.
탐정이나 전직 경찰이 아닌 교도관과 가석방된 전과자가 사건을 파헤친다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저자가 이런 두 인물을 배치한 까닭은 명확하다. 그가 사형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난고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인물이다. 그는 교도관으로 근무하면서 실제 사형을 집행했던 경험이 있다. 흔히 사형제에 대한 찬반을 이야기할 때는 범죄자의 인권을 언급하는 쪽과 반대편에서 사회적 처벌을 떠드는 시민의 목소리가 다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사형을 실제로 집행하는 입장에서 사형제를 바라본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의 어려움, 그가 겪는 혼란처럼 일반 대중이 쉽게 생각해 볼 수 없는 지점을 짚어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특색이 부각된다. 난고라는 인물을 통해 사형제를 바라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지점이 등장하기도 한다. 참 신선한 발상이다. 난고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단체를 통해 사건을 의뢰받는데 그 설정도 덕분에 자연스럽다.
반면 미카미 준이치는 사고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고의였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던 입장이다. 범죄를 저질렀던 재소자의 시점에서 사형제와 처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까딱하면 자신도 사형을 당할 수 있었던 인물,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제도에 대한 이야기. 즉, 이 소설은 사형제를 다루되 그것을 아주 독특한 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사형제에 맹점은 없는지,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쓰였다. 물론 이것은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다.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법률 용어도 등장하고 (이에 대한 각주를 위해서도 개정판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의 독특한 사회 정치 환경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 언급된다. 하지만 ‘개전의 정’처럼 죄에 대해 뉘우치는 기색이 뚜렷한가의 여부로 감형이 이뤄지는 부분이나, 의도성에 따라 형벌의 크기가 크게 달라지는 등 논란의 여지는 한국에서도 동일하기 때문에 소설을 따라가는 데 무리는 없다. 게다가 인간이 만든 법에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그 의도와는 다르게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메시지는 국경을 뛰어넘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단순히 나쁜 놈들은 싹 다 없애 버려야 돼, 라든가 범죄자의 인권도 소중해,라는 일차원적인 의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 것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듭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을 억지스럽거나 교조적으로 다루지 않고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줄거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문도 있었다. 소설 초반에서부터 왜 난고가 미카미 준이치를 선택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준이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맡는 것이 좋다. 난고가 제안한 금액은 그의 범죄 때문에 부모가 갚아야 하는 빚의 상당액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고 입장에서는 준이치를 선택할 이유가 딱히 없다. 그는 난고가 감독하던 교도소의 재소자였다. 만약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면 수사와 정보 수집에 능한 전직 경찰이나 변호인 같은 인물을 섭외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물론 소설 중간에 그 이유가 등장하긴 하지만, 딱히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이는 사형제도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물 설정을 가져가다 보니 생긴 허점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두 인물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형사물처럼 흘러간다. 추리의 쾌감보다는 숨겨진 반전을 찾아가는 흐름에 방점이 꽂혔다. 중반까지 크게 추리랄 게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그걸 보완한다. 다만 트릭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독자라면 시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중후반부터 이야기가 급전개된다고 느꼈고, 두 인물이 각각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 사건의 전모를 마주한다는 이야기 구조가 아주 흥미로웠다. 이 두 개의 구도가 후반의 긴장감을 끌어올릴 것이다.
소설은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맨 마지막에 등장한 반전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로 인해 사형제도에 질문을 던진다는 소설의 메시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해당 인물이 소설 내내 보여줬던 생각과 태도가 무너졌다. 그 의도성을 알고 나면 진심처럼 느껴졌던 것이 진심이 아닌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저자의 선택이지만, 메시지를 위해 캐릭터가 무너진 아쉬운 지점으로 느껴졌다.
<13 계단>은 추리 소설이지만 사회적 사건, 혹은 형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적합한 소설 같다. 2025년에 읽기에는 조금 옛날 시대처럼 느껴지나 몰입도가 높고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다만 사건 현장에서 추리를 진행하는 내용을 좋아하거나, 법이나 사형제도 등 복잡한 사회 이야기를 싫어하는 독자에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리뷰 내용에서 흥미를 느낀 부분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다만 읽을 때는 메모지 한 장을 준비해서 인물의 이름과 직업, 대략적인 설명을 적으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다. 외국어 고유명사가 낯설고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