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관계
여동생이 적지 않은 나이에 드디어 쌍둥이 출산을 했다.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친정엄마는 동생의 육아를 도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가까이 사시고, 또 쌍둥이라) 그러니까 한동안 자유로웠던 엄마의 인생이 이젠 당분간 외손주들에게 묶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조리원에 있는 동안 우리집에 한 번 놀러 오겠다고 했다. 앞으로 우리집에 오기 힘들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느 때 방문보다 엄마의 이번 방문이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엄마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도록 신경을 좀 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즈음의 친정엄마는 나보다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당시의 나의 기억에서 엄마는 바쁘고 피곤한 사람이었다. 밥은 거의 할머니께서 챙겨 주셨다. 교사라는 직업 때문에 일 년에 두 차례 방학이 있을 때에만 엄마는 다소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엄마가 일을 하시느라 바쁘면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철이 든다’는 것이 다르게 생각해 보면 생존 본능이 일찍 발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해지긴 하겠지만, 그만큼 아이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은 아무래도 줄어드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우리들과 늘 함께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늘 부족하게 느껴졌다. 내가 친정엄마에게 거의 유일하게 서운해 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요리에 별 취미가 없는 내가 최근 들어 조금 마음을 바꿔 먹었다. 우선 첫째가 그전과 달리 잘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건강을 챙기기 위해선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체력도 좋아진 것 같고, 요리도 좀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하다 보니 어느새 나만의 시그니처 메뉴가 생겨났다.
그래서 엄마가 집에 있는 동안 그 시그니처 메뉴, 김밥을 만들어 주었다. 과거 엄마가 만들어준 그 김밥 맛에 약간의 변형을 준 것이었다. 엄마는 정말 맛있다며 배불리 먹었다. “이젠 이런 김밥 만들어 먹을 일도 없지?”하고 물으니, 아빠와 단둘이 살다 보니 밥을 짓는 양도 많이 줄었단다. 어쩐지 엄마, 아빠가 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평소 잘 안해먹는 수박주스도 해주고, 마침 집에 꽃게가 있어 꽃게라면도 해주었다. 저녁엔 집 근처 맛있는 갈빗집에서 배불리 갈비를 드시게도 해주었다. 어느새 엄마는 우리 아이들처럼 내가 챙겨주는 음식들을 먹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친정에 가면 아직도 엄마가 모든 끼니를 다 챙겨주시지만) 무튼 엄마가 잘 드시고 가니 마음이 뿌듯했다.
내 기억으로 엄마는 본인의 엄마(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에게 이런 대접을 하신 적이 없다. 우선 일하는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그런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으셨고,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모녀 사이가 꽤 좋았는데, 돌이켜 보면 둘의 성향이 꽤나 비슷했다.
엄마는, 그리고 나의 외할머니는 딱 여장부 같은, 그런 여자였다. 그래서 생활력도 강하고, 문재해결능력도 좋았으며, 무슨 일에든 대범했다. 하지만 섬세함이나 공감능력은 부족했다. 엄마는 본인의 그런 성향이 야기하는 아이들의 빈자리나 외로움을 좀체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한창 크고나서 엄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본인 자식이 결핍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신 것니다.
한때 이런 내가 너무 나약한 것이 아닌가, 너무 징징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한 적도 있다. 확실히 나는 엄마와는 다른 성향을 타고난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엄마처럼 강하진 못해도 엄마보단 섬세하고 감수성도 풍부해서 또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걸. 친정엄마는 이런 나를 조금 이해하진 못하는 것 같긴 하지만.
엄마의 외조손 육아가 조금 걱정되는 건 이런 연유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 형제 모두를 출산하고 딱 한 달만 보고, 할머니(+증조할머니)들에게 육아를 맡겼다. 바로 일에 복귀하신 것이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그 당시에 겁도 없이 애를 넷이나 낳을 수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집에 퇴근하고 나서는 본인이 해야 할 육아 부분이 분명 있었겠지만, 그래도 육아를 혼자 전담하는 것보단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래도 친정엄마는 나름 본인의 삶에 만족하시는 것 같다. 엄마는 엄마의 천성대로, 정말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오셨다. 아직도 운전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고속도로 타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친정엄마. 운전을 가급적이면 하기 싫어하는 우리 시어머니와는 사뭇 대조되긴 하다.
하여간 70넘은 아이에 육아를 하시게 될 엄마의 새로운 삶이 또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너무 힘들다고 징징대진 않을까? 아니면 이조차도 씩씩하게 잘하실 수 있을까? 어쨌든 자식의 입장에서 엄마가 너무 무리하진 않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육아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