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집착
시아버지의 암이 발병한 후로 1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니까 적어도 1년은 생존하셨다는 얘기다. 그간 시아버지가 받은 수술과 항암치료, 그리고 각종 보조 치료들은 생존을 이어가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를 했겠지만, “완치”라는 기적을 이루어내진 못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암수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 다소 우울해하셨다. 며느리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셨겠지만, 나는 이번엔 “저는 이제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어요.”라고 말했다. 그게 나의 진심이었으므로. 그리고 어머니께서 헛된 바람은 그만두고 현실을 직시하시기를 바랐다.
너는 아직 젊으니까, 혹은 너는 친아빠가 아니니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병원을 전전하면서 단 몇 년이라도 더 살려고 집착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그보단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마침표의 순간까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만끽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정리 전문가들은 나이 60을 넘으면 이제 슬슬 과거의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말한다. 노년에 접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몸은 많이 닳고 닳았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몸과 정신이 성할 때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평생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아직 젊은 2,30대는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중년에 접어들고 내 몸이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삶이 더욱 진정한 것들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그와 같은 집착이 일종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남편을 늘 못마땅해하고, 며느리에게 늘 시아버지의 못난 점을 불평하곤 했다. 물론 그럴만하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늘 마음 한 켠에서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것이 소위 “문제 많은” 남편을 개도하는 데 특효약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나에게도 자꾸 자신의 아들을 닦달하라고 종용하곤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나도, 남편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게 뜻밖에도 이를 수도 있다. 배우자의 죽음은 자식의 죽음에 이어 삶에서 최고의 스트레스를 받는 사건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마지막에 죽는 자와 남겨진 자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기 위해선 지금 무얼 해야 할까. 서로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고,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영혼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그 마음뿐이 아닐까.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갈등이 없을 수는 없고, 작고 사소한 싸움들은 종종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나의 배우자는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돈도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다 헛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갈등은 그런 것들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시어머니도 남편의 가장 미운 점이 자기 돈을 사업자금으로 끌어다 쓰곤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이에 조롱이라도 하듯이 아버지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적지 않은 돈을 소비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불평하는 것이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이미 한 번 살아본 것처럼 말한다고 들릴지 모르겠지만, 장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래 살지 못하더라도 그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고 느끼는 것이 관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실 너무 오래 사는 건 생각보다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산 만큼 내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많이 보게 되고, 그만큼 인생의 마지막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물론 고독이 절대적으로 나쁜 건 아니지만.
나는 시부모님에게 엄청 효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효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불효는 아마 시어머니께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갖지 말라는” 냉정한 말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오히려 자식이 할 수 없는 말을 해준 것이라고,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의 이런 죽음에 대한 철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종용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마음에 없는 위로나 하면서 삶에 대한 집착에 동조하고 싶지도 않다. 역설적으로 이런 초연한 마음이 나의 평범한 오늘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사실. 실로 요즘 모든 게 너무 예쁘다. 우리 아이들, 남편이 늘 온전하다는 사실도 참 행복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캐롤을 들으면, ‘또 겨울이 왔구나!’ 한다.
그러니까 나는 “메멘토 모리”를 이해하면서 삶을 더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같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