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스러웠던 나의 할머니를 애도하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작년 연말이었다. 그때 이미 요양원 생활이 거의 2년쯤 접어들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내가 갈 때마다 할머니는 거의 늘 나를 알아보셨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눈빛에 전혀 광채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세상을 다 사신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안 죽는다. “
그 말이 그렇게 가슴속 깊이 남았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일까. 할머니는 이듬해 봄부터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몇 차례 병원 입원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올해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다. 친정엄마에게 물어보면 여전히 안 좋다는 말뿐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복덕”이라는 이름처럼, 복이 많은 여자였다. 일단 친정이 풍족했고, 시집 가서는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다. 자수성가한 남편 덕에 한겨울엔 여우목도리에 모피 코트를 입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정신이 온전해셨을 때만 해도 늘 아침에 곱게 화장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향수를 좋아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자라선지 나도 늘 피부를 예쁘게 하는데 신경 썼고, 향수를 즐겼다.
맞벌이셨던 엄마를 대신해 우리들을 키워주신 것도 할머니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너무 풍족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인지 손주들의 양육에는 정신적인 것이 다소 결여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밥을 먹을 때면, 늘 “더 먹어. 더 먹어. “ 하셨고, 매일 나보고 삐쩍 말랐다면서 더 먹고 뽀얗게 살 좀 찌라고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말을 듣고 자라선지 나는 과식하는 것을 늘 꺼리게 되었다는 것.
할머니가 더 이상 화장을 하지 않게 되었던 그 시점이 바로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치 않아지기 시작한 때였다고 본다. 할머니는 가끔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할머니의 화장대에는 할머니의 화장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친정에 갈 때마다 가끔 화장품 위에 내려앉아 있는 먼지를 닦아내곤 했다.
가끔 할머니가 해준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다. 할머니의 음식은 언제나 푸짐하고, 간이 셌다. 양이 많아서 모든 가족들이 양껏 먹어도 늘 남았다. 부잣집 딸은 손이 큰 법인가 보다. 아마도 잘 먹인 할머니 덕에, 그리고 그 시절에도 나름 큰 키였던 할머니의 유전자 덕에, 나도 큰 키가 된 것 같다.
최근 할머니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잘 못 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유일하게 남은 조부모님이기 때문인지, 혹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 때문인지 할머니의 화장품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끔 삶아주신 머릿고기가 생각났다. 이제 그런 것들은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아련한 추억들이 되버렸다.
할머니의 운명 소식은 놀랍긴 했지만,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그때 할머니가 이미 자신의 삶에서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죽어도 괜찮다는 것, 아니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말을 듣지 않는 몸, 온전치 않은 정신, ‘나’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삶에 어떤 여한이 있을까. 잘 가신 것이다.
늘 풍족하셨고, 원하는 것을 거의 다 가지는 삶을 사셨지만 자식 농사는 시원치 않았다. 출세한 남편과는 성향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마다 곱게 화장했던 할머니, 밤에는 늘 부드러운 실크잠옷을 입고 잠을 주무셨던 할머니가 나에게 어떤 여성으로서의 롤모델 같은 것이 되어준 것도 같다. 나 역시 어떤 사치스러운 면모가 있는데, 이는 다소 투박한 시골여자인 나의 친정엄마로부터 유래한 것이 절대 아니니까.
이번에 친정에 가면 할머니 향수를 하나 가져올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다 쓰지 못하고 남기신 향수… 나와 달리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진한 향수와 화장품 냄새는 좋아했던, 사치스러운 우리 할머니. 나는 꽃도 좋아하지만, 할머니처럼 진한 향수도 좋아하는 여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