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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Jun 21. 2023

창조적 삶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나는 애초에 개성이 강한 아이였다.  그게 겉모습이 요란하다거나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꿈꾸고, 무언가 나 개인의 고유한 창조물이 나오는 것을 고대하곤 했었다. 그래서 만물이 새롭게 생동하는 봄을 특히나 좋아했다.


한때는 예술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림도 제법 잘 그렸는데 소묘에는 능하지만 왠지 모르게 색감에 대한 센스는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좀 “선”적인 것에 꽂혀 있었다. 그게 결국 무용이라는 것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무용, 그러니까 춤이라는 것도 다양한 형식이 있는데 나는 역시나 선적인 유려함이 특징인 고전무용, 그러니까 발레나 한국무용을 좋아했다. 특히 발레를 좋아했고, 나의 20대 전반은 발레에 온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열정적이었다. 물론 나는 법대생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생각해 보면 나는 주전공이었던 법보다 부전공이었던 무용에 훨씬 많은 열정과 애정이 있었다.


그 연장선 상에서 대학원을 한예종으로 가게 되었고, 거의 여기서 예술에 대한 갈증은 절정을 찍은 것 같다. 매너리즘이었을까? 그토록 좋아하고 사랑했던 예술을 마음껏 향유하고 보니 이것이 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참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일종의 방황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말 하고 싶어서 들어갔기보다는 일반 회사 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는 다소 철없는 생각으로, 좀 소극적으로 학업에 임하게 된 것 같다. 어이없게도 이번엔 다시 법학이었다. 나는 사실 개념적인 것, 그리고 분석에 능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약간 직관적인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부분 때문에 예술에 심취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후에 법학을 다시 공부하면서 느낀 건 어느 학문에서든 어떤 단계에서는 이 직관이 꽤나 중요하고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논문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닌가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고뇌하고, 좌절하고, 정말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무엇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박사과정에서 비로소 내가 삶에서 그토록 추구하던 “창조”라는 것을 조금은 깨달은 것 같다. 물론 박사라고 뭐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그동안 연구했던 수많은 학자들의 어깨 위에 서서 아주 약간의 자기 생각을 보태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삶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지 어렵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려움이 창조행위를 더 빛나게 하고 보람 있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최근에 두 번의 창조 행위를 한 바 있다. 그것도 내 몸이라는 신체를 이용해~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 말이다. 한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뱃속에서 무사히 잘 키워낸 후,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엄청 대단한 일이다. 나는 그래서 가끔 아이들을 보면 내가 이 아이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는다. 나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웃고, 내 품에 안기는 이 창조물이 정말 “언빌리버블” 하다.


박사 논문을 쓰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 중 뭐가 더 힘들까? 보통 아이를 낳으면 5년이 늙고, 박사논문을 쓰면 10년이 늙는다고 한다. (그럼 나는 도합 20년이 늙은 셈이다. ㅎㅎ) 시간이나 에너지 측면에선 박사 논문이 더 쓰기 힘든 건 맞다. 그러나 그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박사논문보다 우리 아이들이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다.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ㅎ) 그런데 나는 내 논문도 어쩌면 내가 잉태한 무엇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내 모든 정체성, 지성,  DNA가 다 담겨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자꾸 크면서 변하지만 박사논문은 변하지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사주로 봤을 때 나는 무언가를 “생”하게 하는 에너지가 강한 편이다. (이걸 사주에서는 ‘식신’과 ‘상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토록 창조적인 것에 목말라 한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세 창조물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인지 요즘은 그 “생”하는 에너지가 많이 쇠한 것 같다. (아마 그래서 브런치에 한동안 글도 안 쓴 것 같고…) 일종의 노화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사실 앞으로 두 아들을 어떻게 잘 키워낼 것인가가 내 삶에 남은 큰 창조행위인 것 같다. 지금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텨낸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도 열심히 아이들 데리고 또 무슨 새로운 일을 할까, 재밌는 것을 보여줄까, 맛있는 것을 맛보게 해줄까, 고민고민 또 고민… 창조적 삶도 참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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