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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Jun 22. 2023

남편의 생일

그를 사랑하는 법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내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소박하게나마 생일상을 차려 주어야 하겠지만, 나는 작년에도 그리고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딸랑 편지 한 통이다.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어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핑계 댈 수도 있지만,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별 거 없었다. ㅎ


나는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려지는 이상적인 아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요리를 잘하지도, 살림을 잘하지도 못한다. 사실 요리나 살림은 남편의 도움(그리고 시댁의 도움)을 간간히 받으면서 애면글면 하고 있다는 게 맞다. 늘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것도 일정 부분은 타고나는 게 있는 것 같다.


무튼 그렇게 생일상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는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나의 남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번을 물어봤지만 남편의 아이들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참고로 남편은 평소에 거짓말이나 립서비스를 정말 못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남편의 모든 행동, 그리고 삶의 동기를 추적해 보면 거기에 나라는 사람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는 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우선 남편은 사람에게 곁을 쉽게 잘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짧지 않은 연애 기간 동안 나는 남편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은 스타일이지만,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고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향이었다. 거기다 과묵한 사람인지라 속내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게 좀 신기하긴 하다.


사람이 친해지는 데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고 본다. 처음엔 그 사람의 신상명세 정도만 파악하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는 단계이다. 쉽게 말해 “액면가”로 서로를 알아보고 이걸 토대로 만나는 사이이다. 여기에는 많은 사회적 편향들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첫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다음의 단계가 바로 호구 조사, 교우 관계 등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을 파악하는 단계라고 본다. 여기서 상당 부분 그의 개성을 알아가게 된다. 쉽게 말해 이런 부모 밑에 자라고, 이런 가정환경이어서 이런 성격이구나 하는 걸 서서히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고 그가 어떤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지가 그의 친구 및 지인들을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수많은 연애관계가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다음이 바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니 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데)을 알아가는 단계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들어간다고 할까? 그 사람의 모든 약점, 치부, 어두움 등을 파악하는 단계가 바로 이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실패한 결혼관계가 아마도 이 단계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거나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남편과 나는 결혼 전 “소울 메이트”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의 내면의 상처, 그림자,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 생활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바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보다는 한 번 생각하고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사랑의 다른 이름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보았을 때, 그것이 어떤 연유로 그런지 상대방과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단해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상당 부분 나의 내면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남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못난 부분이 없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게 좋다.


남자들은 보통 감정을 여자처럼 섬세하게 다루지 못한다. 내가 어떤 부정적 감정에 휩싸였을 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왜 그런지 잘 모른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핀다. 반면 여자는 관계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좀 더 관심이 많고, 명료하게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남편에게 해준 부분이 바로 이거였다. 그의 감정을 섬세히 파악해 주고, 해소해 주는 것. 사실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 해결이 되기도 한다.


나에겐 남편 말고도 두 남자, 즉 두 아들이 또 있다. 이 녀석들도 아마 남자라는 성향 자체, 혹은 암묵적인 사회 규칙 때문에 어느 순간 입을 꾹 닫는 남자가 될 것이다. 내가 엄마의 위치에서 아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잘 다뤄줄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모자 관계에서 비롯되는 여러 방해물 때문에 쉽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자꾸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나보다 더 이해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살 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아들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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