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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Aug 04. 2023

공부하기 싫다

어른이 되어도 똑같다

막상 건강해지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그동안 소홀히 했던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더 놀고 있다. 그래선지 더 건강하고 튼튼해지는 것 같다. (노는 중에도 운동은 소홀히 하지 않는 아줌마) 모든 상황과 여건이 “이제 좀 뭘 해봐야지.” 하는데 내가 계속 버티고 저항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꼴이랄까.


공부든 놀이든 관성이라는 게 있다. 공부도 자꾸 해 버릇해야 몰입하게 되고, 노는 것도 습관이 안 되어 있으면 놀 줄 모른다. 그동안 공부를 손에서 놓아버린 탓인지 진짜 하기 싫다. ㅎㅎ


언젠가 지인 박사님과 얘길 하다 “박사라는 것이 어쩌면 나에겐 주홍글씨 같아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을 때까지 나의 ”박사“라는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의든 타의든 나는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이따금씩 해야만 하니까. 주변에서 “힘들게 박사까지 해놓고 집에서 놀고 있네! ”라는 말에 배 째라 할 자신감도 솔직히 내게는 없다.


살림이나 육아를 기깔나게 잘하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몇 년 해보니 내겐 그런 소질이나 능력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참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맘이 좀 씁쓸하긴 하다. 뭐가 되었든 열심히 하는 무언가가 내 삶 속에 늘 있는, 그런 “갓생”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간간히 “갓생”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때 늘 달고 살았던 것이 목 결림, 그리고 항생제였다. 과하게 몸과 머리를 쓰면 확실히 나를 ‘갈아 넣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여실히 깨닫게 된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잘 나가네‘, ’열심히 산다‘, ’대단하다‘ 소리를 해주니 좀 힘들어도 꾸역꾸역 하게 된다. 지나고 보면 그런 시기에 건강하진 않지만 유독 성취는 많다. 그렇게 우리는 더 잘나기 위해 건강을 얼마간 저당 잡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공부를 하기 싫은 이유가 이런 과거의 경험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을 하다 보면 그에 열정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필경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니까. 거기다 이제 나는 내 몸만 돌보면 되는 처치가 아니다. 한 집안의 안녕과 평안을 책임지는 안주인이 돼버린 것이다. 옛날 엄마들이 박카스를 자주 먹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엄마가 되고 나니 박카스를 보면 종종 슬프다.)


아직은 초보 엄마라 그런지 “내 일”에 얼마만큼 에너지를 써도 되는지 가늠이 잘 안 된다. 지금의 컨디션에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에너지를 써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꽤 오랜만에 찾아온 심신의 건강과 조화를 좀 더 오래 향유하고 싶기도 하다. 너무 좋아!)


이따금씩 나의 논문이 좋다는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아이돌은 아니지만 한창 주가를 올리는 그들이 거의 공백시기 없이 활동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는 하다.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는데, 그만하기가 참 힘든 것이다. 뭔가 삶에 대한 직무유기인 것 같다랄까. 혹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은 욕망도 얼마간은 있는 것 같다.


하, 그럼에도 공부란, 논문 쓰는 것이란, 사서 고생하는 일이긴 하다. 지나고 보면 그럴듯한 성과물이 탄생하긴 하지만, 막상 그 상황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역경과 고비들이 삶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려고 박사를 한 건 아닌데… (그럼 무엇 때문에 했나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거 말곤 특별히 할 게 없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여간 ‘주홍글씨’다.ㅠ)


아직은 좀 무덥지만 곧 청량한 가을이 올 것이다. 올 가을엔 지금까지의 직무유기에서 벗어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좀 해야겠다. 뭔가 안식년이 끝나버린 기분…!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게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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