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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Sep 21. 2023

엄마의 염세주의

엄마가 화가 나있던 이유

아이들을 보다 보면 소위 “현타”라는 게 가끔 온다. 그러니까 둘째가 하루에 6번을 대변을 본다든지, 첫째가 이유 없이 계속 짜증을 낸다든지 할 때 그렇다.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럴 땐 정말이지 내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육아가 여타의 일들과는 다르게 힘든 이유가 아이들은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잘 먹고 잘 자고 나서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칭얼대면서 계속 짜증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 자신의 상태나 현 상황을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 없기에 그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함은 정말 엄마들을 힘들게 한다. 거기다 두 녀석 모두 이럴 때에는?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이 정말로 싫어진다.


용감하게 4남매를 낳았던 친정엄마 역시 과거의 어느 때에는 그런 염세주의자 같은 분위기를 종종 풍기곤 했었다. 보통 그런 때에는 아빠가 밖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식으로 육아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때였던 것 같다. (옛날의 아버지는 확실히 지금의 아빠들보다 덜 가정적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그때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세상이 싫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없다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됐다. 식도락이 삶의 낙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먹는 것도 이젠 즐거움을 줄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엄마는 아기 먹이느라 식사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둘째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엄마가 먹는 것에 관심이 부쩍 늘면서 나의 식사는 더 이상 즐거운 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자꾸 식은 밥을 먹다 보면 밥을 먹는 것 자체가 싫어진다.


아기가 더 어릴 때는 새벽 수유라든지 이앓이 때문에 수면을 방해받아서 힘들다면, 좀 더 커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힘든 것 같다. (이 과정이 첫째는 확실히 더 수월했다. 첫째는 잠을 많이 자고, 밥은 잘 안 먹는 애였기에…) 이렇게 삶의 기본적 욕구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다 보니 어느 순간 현타가 오고, 세상이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삶의 기본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하는데 그런데도 좋다면 그게 정신병 아닌가!)


이 시기의 아이들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너무 무력해서 모든 것을 양육자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먹고 싸는 일을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주로 양육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삶의 질이 떨어지는 인생을 몇 년 동안 살아야 한다. 아이나 하나가 아닌 둘, 셋이 되면 그 기간은 더 길어진다. 나도 둘을 낳았지만 요즘 시대에 둘 이상을 낳는 엄마들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받을만하다 생각한다.


친정엄마는 결코 염세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는 지나친 낙관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그런 선천적인 낙천성을 점차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4남매가 어느 정도 장성했을 때였다. 양육의 고충이 더 이상 본인의 삶을 짓누르지 않게 되자 엄마 역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친정엄마가 있다 보니 나도 용감하게 아들 둘을 낳은 것 같긴 하다.


나에게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것이 있었나? 물론이다. 과거 어느 때에는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지금은 가끔 여유가 생겨 먹게 되는 맛있는 라떼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라떼 사 먹는 게 뭐 얼마나 힘들어서 그러냐 하겠지만, 아이 둘을 보다 보면 그렇게 사소한 일이 일주일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대단한 일이 된다. (애초에 맛있는 라떼를 주변에서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도 한몫 하긴 한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주는 것이 사랑스러움과 행복밖에 없었다면 지구에 사람이 넘쳐났으리라.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들도 하나 둘만 낳는 것을 보면 양육의 무게라는 것은 확실히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평등한 것 같다. 자식 농사라는 게 그렇게 뼈가 빠지는 일이다. 가끔 세상이 싫어질 만큼.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첫째를 등원시킨 후 맛있는 라떼를 하나 사 먹으러 가야겠다. 물론 둘째가 칭얼대지 않고 점잖게 엄마를 따라와 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넷을 키운 친정엄마에겐 이런 라떼도 없었을 텐데,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래서 오늘 새삼 엄마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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