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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Oct 16. 2023

공부하는 엄마

정체성의 늪

육아를 하면서 마음 어딘가가 늘 불편하고 답답했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게 요즘은 무엇인지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다. 바로 “공부”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공부를 계속 외면했느냐 자문해 보면, 육아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하고 싶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반대로 나는 그동안 공부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육아라는 활동에 숨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육아”로 현실도피를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논문을 쓰고, 계속 연구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거기다 학자들 세계의 독특한 ”생리“를 파악하고 내면화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어쩌면 이것들을 잠시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일종의 번아웃이 왔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육아라는 세계에 들어오면서 학업의 세계를 마침내 벗어났다고 안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역할을 계속하면서도 어딘가 미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무언가 자꾸 쓸데없는 일들을 하면서 이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 싶지만, 그동안의 내 정체성을 일거에 벗어던지기는 힘든 것 같다.


대부분의 엄마들의 고민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육아를 하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 일만 하기도 바쁘고 힘들었는데, 육아를 하면서 내 커리어도 같이 쌓기는 너무 무리일 것 같다. ‘ 그래서 고민만 많을 뿐, 예전에 하던 일로 다시 돌아갈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 두려움에 압도되어 “경단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좀 생각을 달리 해보려고 한다. 육아가 나의 천직이었다면 모를까, 아직은 내 일에 어느 정도의 미련 혹은 애정이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그 일을 해보자고. 아예 안 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해보는 건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지만 육아와 공부를 같이 하면 적어도 내면의 불편함은 해소될 것이다.


가끔은 공부를 이렇게 많이 한 것이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것 말고 뚜렷하게 잘하는 게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일을 오래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일 자체가 나의 정체성의 큰 부분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간과했다. 그래서 퇴직을 한 사람들이 한동안 멍 때리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어느 날 갑자기 생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튼 내면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조금씩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두 아들 녀석의 방해가 시도 때도 없겠지만,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했다. 어쩌면 내가 공부하는 엄마이다 보니 적어도 애들한테 공부하라 잔소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의외로 엄마 따라 애들이 자연스레 공부를 따라 하는 선순환이 이어질 수도 있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두 아들은 엄마처럼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니 막연하긴 하지만, 왠지 모르는 안도감이 들기도…  이것도 팔자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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