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남편을 따라 지방 시로 내려온 나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게 된 것도,
늦둥이를 낳고 오롯이 두 아이를 키우게 된 것도 모두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었다.
엄마는 큰 딸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난 것에 못내 아쉬워하셨다.
지금까지 두고두고 그때 적 이야기를 꺼내 여전히 아쉬워하실 만큼이나.
정작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니 그만뒀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 잘 키우려고 애썼을 뿐.
집안일도, 육아도 모든 것이 서툰 나이만 먹은 초보 주부였다.
그때 결심한 것 한 가지는, '가족들 아침밥은 꼭 챙기자'였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아침밥을 못 먹고 다녔다.
특히 인천에서 서울로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새벽 출근하느라 한 번도 아침밥을 못 먹었다.
결혼 후 서울 살면서도 아이 챙겨 유치원 데려놓느라 급급해 아침밥은 거의 못 먹고 다닌 것 같다.
입 짧은 큰 아이 간단하게 먹이는 것도, 출근 전 유치원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늘 아둥바둥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서울에 두고 온 나는 아침밥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게 있었나 보다.
그동안 나와의 약속은 잘 지켰다.
아침밥은 꼭 오첩 아니 육첩 반상으로 준비했고 밥이 아닌 빵은 우리 집에서 간식이었다.
아침엔 꼭 밥을 먹어야 한다는 지론으로 아침부터 굴비를 굽거나 삼겹살, 소고기를 구운 날도 있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두 아이는 성인이 돼 지방 시를 떠나게 됐고
내겐 아이를 맡겼다는 핑계로 친정집에 가 느긋하게 놀다 오는 여유도 생겼다.
어느 날 울 엄마 정님 씨가 싱크대 앞에서 말했다.
얘, 뭘 그렇게 차려 먹이느라 애쓰냐.
대충대충 해 먹이지.
넌 니 자식이니까 그리해 먹이지만 나한테는 너가 내 자식이야.
내 자식 고생하는 거 싫어.
울 딸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종종 내 옆에 와서 쉬다 가.
뜬금없는 정님 씨의 사랑 고백이었다.
눈물 나는 엄마의 자식 사랑, 그래, 나도 엄마 있어!
그날 엄마 옆에서 오십 넘은 딸은 어린아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