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 눈물바다, 사계절, 2009.
199X년 X월 XX일, 엄마아빠가 또 싸운다. 난 전혀 안 들리는 척 방에서 꼼짝 않고 있는다. 그러다가 오줌이 너무 급하면, 참다 참다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하고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다녀온다. 오줌을 시원하게 싸고 다시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에 들어간다. 엄마아빠도 내가 안 보이는 눈치다.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아무튼 내가 안 보이는 것 같다. 엄마아빠의 싸움이 잠잠해질 무렵, 나도 적당히 잘 준비를 한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들어가니 이제야 눈물도 긴장을 풀고 눈가에서 스르르 흘러나온다. 한 번 나온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른다. 오래 참았던 건 오줌만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이런 날들의 기억을 몇 개 가지고 있다. 엄마아빠는 자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싸웠기 때문이다. 현관문 밖에서 싸우면서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아빠의 굵은 헛기침소리가 현관문 너머에서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신경이 곤두섰었다. 아빠의 헛기침소리가 그저 잠긴 목을 푸는 정도인 건지, 기분 나쁜 감정을 묻힌 아주 언짢은 헛기침 소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힌트는 또 있었다. 아빠가 들어오고 나서 엄마가 바로 들어오면, 그날은 싸우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집에 들어오고도 몇 초가 흘러도 엄마가 바로 오지 않을 때는 싸운 날이었다. 평소에도 엄마는 아빠 뒤에서 느리게 걷는 편이었는데 두 분이 다툰 날에는 유독 더 거리를 두고 걸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만큼 육체적 거리도 멀어진 것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내게 이런 힌트는 꽤나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삶의 방해 요소들이었다. 도무지 어린이가 편안하게 살 수가 없었다. 애니메이션 보고, 스티커나 모으고, 다이어리나 꾸미면서 윤택하게 살 수가 없었다. 엄마아빠는 툭하면 싸웠고 툭하면 서로를 소 닭 보듯 했다.
엄마아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물건을 쿵, 툭, 탁,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
"가서 아빠 밥 드시라고 그래."라며 식사 때마다 내게 시키던 엄마의 무미건조한 목소리.
아빠가 누워 있는 안방 문을 살며시 열고는 짐짓 용기 있는 척, "아빠 밥..." 외치던 내 목소리.
말도 서로 안 할 정도로 냉전 중이면서도 꼭 식탁에 앉아 엄마가 차린 밥을 먹던 아빠의 음식 씹는 소리.
그런 소리들은 참 재미없다. 설렘도 없고 미소도 없다. 어쩌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에 못질 같은 그런 소리는.
나의 기억에 이런 소리들이 여전한데, 이런 내 맘도 모르는 엄마는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그래도 엄마아빠가 이혼 안 해서 좋을 때도 있었지?"
"아니?"
나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잘 생각해 봐, 한 번쯤은 있었을 걸!"
엄마도 숨도 안 쉬고 맞받아 쳤다.
엄마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열두 번은 더 하고 싶던 이혼을 끝내하지 않고 참아냈던 것에 대한 뿌듯함도 있었다. 이혼을 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자식들 때문이라는 견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엄마는 저리 당당하게 역성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난 며칠 아팠다. 이제 더는 이불속에서 긴장과 공포를 눈물로 닦아내는 어린이가 아니니까, 차라리 엄마랑 싸우면 싸웠지 울지 않았다. 다만, 며칠 속이 불편했고 두통을 앓았다.
엄마는 "때문에" 화법을 좋아한다.
너 때문에 산다.
너 때문에 못 헤어진다.
내 귀에는 너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괄호 속의 말이 들려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나만 아니면 아빠랑 이혼하고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분인데,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엄마는 지금도 아빠랑 주말이면 재래시장 구경을 간다. 가서 만 원, 오천 원 짜리 귀여운 털모자도 사 오고, 국수도 사드시고, 곰탕도 사드신다. 결혼 사십 주년을 맞아선 두 분이 금은방에 가서 금반지도 맞추었다.
아빠께 초밥을 사드리면 아빠는 "엄마 것도 포장해 가자" 그러시고
엄마께 주말에 회 드시러 갈까요, 하면 "아빠는 여름에 회 안 먹어, 딴 거 먹자." 한다.
그럴 때마다 티는 내지 않지만 콧방귀가 킁킁 나온다. 혹자는 내게 그만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뜻이란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왜 진짜 베일 것 같지.
나는 엄마아빠의 싸움을 엿보고, 엿들으면서 굉장히 빨리 어른이 되어갔다. 엄마아빠의 싸움의 기술과 화해의 기술을 보며 나는 인간군상을 분류했고 내가 피해야 할 인간상이 어떤 타입인지를 파악해 나갔다. 처참한 날들이었다. 왜냐하면 엄마아빠에게 싸움의 기술이란 건 무시와 비난밖에 없었고 화해의 기술은 그저 버티기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이 "그건 좀 섭섭하네" "미안해" "괜찮아" ""고마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류의 대화를 나눈 걸 본 적이 없다. 비난과 조소, 경멸, 환멸, 무시, 저주. 작은 일로도 엄마아빠는 이런 과격한 단어가 떠오르게 싸웠다. 누가 보면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 듯, 누가 보면 도박이나 폭력이라도 휘두른 줄 착각이라도 할 듯, 두 분은 매번 서로를 멀리 날려버리는 싸움을 해버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은 터지고, 새우는 눈물바닷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허우적거린다. 나는 친구와 싸워서는 웬만해서는 울지 않았다. 다쳐서도 잘 울지 않았다. 크게 엉엉 울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불 안에서 새우처럼 몸을 굽히고는, 내 눈물이 만든 심연에서 오래도록 이 세계의 슬픔을 조우하고는 했다. 엄마아빠가 싸우지만 않으면 울 일이 없었던 나는.
나는 지인들에게 제발 아이 앞에서 싸우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말을 할 때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반응이 있는데 그게 참 재미있다. 나처럼 부모님의 싸움을 자주 보고 자란 지인은 "맞아, 애 앞에서 싸우면 진짜 공포야. 나도 어렸을 때~~"라며 공감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부모님의 싸움을 거의 보지 않고 자랐거나 봤더라도 평범하고 건강한 싸움을 보고 자란 지인들은 "에이, 그래도 부모도 서로 의견이 다르면 싸울 수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 적당히 싸우는 건 괜찮아." 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이 두 반응 중 하나였다.
나는 이 두 개의 반응을 보며, 특히 후자의 반응을 보며, 입이 살짝 썼다. '적당히' 싸우면 그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자못 신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당히란 싸우는 목적에 알맞은 종류의 감정과 대화를 택해 건강하게 싸움을 마무리 짓는 방식일 것이다. 내 기분을 말하고 상대에게 섭섭했던 점과 개선할 점을 말해주고, 오해한 점이 있으면 사과하고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고 절충하는 것. 이때 사용할 언어 역시 지나침이 없어는 것을 말한다.
감정적으로 적당히, 알맞게,를 기억하는 어른이고 싶다.
남편과 다툴 때도
아이를 혼낼 때도
누군가에게 고충을 말할 때도
누군가에게 소망을 말할 때도
엄마도 아빠도 못한 일이지만 그래서 나도 못할 것만 같다는 공포에 오래 시달렸었지만 그래도 나는 해낼 것이다. 엄마아빠를 닮고 싶지 않아, 미안합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