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소년과 청춘.
누나가 사고를 쳐서 법정에서 벌금 500만원을 물어야 했다. 원래도 가난했던 우리 집은 나의 학교 등록금 및 생활비와 누나의 벌금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남들이 모두 대학 합격에 취해있을 때, 나는 CJ에서 상하차 알바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 새벽 4시에 집앞에서 버스정류장에서 99번 버스를 45분 정도 타고 내린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는 센터 이동차량은 너무나도 검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더 가서 도착한 물류센터에서 입김에 머리카락이 얼정도의 날씨에서 12시간을 일하고 집에 귀가하는 생활을 3개월 동안 지속했다. 그간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벌었지만 내 허리와 어깨는 굽어졌고, 컨디션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기대했던 기숙사 생활은 코로나로 인한 격리 및 룸메이트의 부재로 인해 4개월 동안 혼자 지냈으며, 교내 근처에 식당은 거의 부재했고, 배달을 시켜먹고자 해도, 최소주문금액과 배달팁으로 인해 음식 하나를 주문해도 18,000원이 나왔다. 가난한 내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교내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편의점으로 매일 끼니를 떼웠고, 음식이 물렸음에도 꾹 참고 먹는 생활을 계속해서 지속했다.
또한 20살의 설레는 첫 대학생활에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가정사와 기숙사 생활로 인한 힘듦, 나아가 코로나로 인한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부고 등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예민해진 내게 이러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별을 고했다. 고독했고, 슬펐으며, 불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활동하며, 홀로 자립하며, 홀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첫 출발이었다. 불안정했던 나의 결핍으로 가득찼던 내면이 단단해지고 커지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있는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집과 더 가깝고, 통학할 수 있는 더 좋은 대학으로 가기위한 편입과 준비와 교내 성적을 통한 장학금, 그리고 외부활동들이었다. 학회에 가입해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회에 가서 선배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뭐라도 했고,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교수님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수업이 끝나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1년이 지난 후, 평균 4.3만점에 4.2라는 학점을 받았고, 10개가 넘는 상장과, 영국에서의 해외연수를 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께서도 너라면 충분히 합격할 거라고 하셨다. 그러한 교수님의 따뜻한 말과 함께 원했던 학교로의 1차 서류가 합격하고, 면접을 보는 12월 22일이었다. 전날밤부터 자기소개서를 계속해서 읽으며, 나올만한 질문들을 정리하고, 추가적으로 교수님들께서 내게 질문할 것 같은 내용들을 정리해서 암기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약 2년동안 그토록 손꼽아 기다렸던 면접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교수님의 한 마디의 나는 굳어버렸다.
"너가 어떤 상황이건, 너가 얼마나 간절하건, 너가 무엇을 했건 궁금하지 않으니까, 네가 왜 잘났는지 설명해."라는 말이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와 함께 미리 준비했던 질문의 내용과는 정말 다른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학과의 질문에서는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내가 있던 전적대에서는 대학원 수업에서나 나올법했던 전공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분은 ~~이고,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 모르겠습니다를 4번 답변하고, 1번의 성공적인 답변을 하고난 뒤, 교수님은 "다른 지원자들도 많이 있으니, 이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라는 말과 함께,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나를 내보냈다.
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학교에서 벗어나면서 학교에서 신촌역까지 걸어가는 30분 동안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은 나를 위해 늘 고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자, 그 동안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허탈함이자, 질문들을 미리 예견해 준비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학교 홈페이지에서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확인하며, 내 멘탈은 유리처럼 부서졌다.
그렇게 나는 차가운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집에서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은채 휴대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또한 불합격 통보 당일날 눈물을 흘리며 늦게 들어온 내 모습을 본 뒤부터는 내게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생활을 보낸지 3주째 되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퇴근 후 나를 거실로 부른 뒤, 나를 앉혀놓고 얘기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거니?", "상위 클래스에서 살고 싶었던 거 아니야?", "많이 쉬었잖아. 이제 일어나야지.", "아빠처럼 매일 이렇게 힘들게 살고 싶은 거냐?"라는 말을 하면서 나를 일깨우려 하셨다.
나는 그 동안 마음에 맺혀있던 말들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아버지 저는 대한민국에서 성공하고 싶었어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아버지에게 좋은 집을 사주고, 좋은 차를 사주고, 매일매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버지 저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이번 편입에 붙고 싶었어요.", "아버지 저는.... 제 노력과 존재를 저를 처음부터 아니꼬아 보았던 교수들의 몇 마디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어요...."
아버지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알게되었다. 혼자 일찍이 철이 들며 가정을 위해 공부로 노력해왔던 힘든 나날을 견뎌왔던 내게 위로를, 힘든 삶 속에서도 '나'라는 유일한 자랑이자 희망을 가슴 속에 품었던 아버지에게 위로를 주는 시간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가족, 형제자매 정신질환자 가구. 나를 설명하는 3단어들.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불합격은 나보다 더 힘든 이들의 삶을 보게 했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더욱 열심히 살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기생충', '완득이', '로기완'와 같은 영화를 보며, 나는 사회소외계층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사회혁신가가 되어 정부, 기업이 하지 못하는 사외소외계층들에 대한 국제적 기준을 세우고자 목표와 마음을 먹고서부터는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사회소외계층들을 위한 지원 아이디어와 창업 기획들로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 기여할 인재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했다.
수 많은 성과를 내며, 꿈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고, 많은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내 능력은 성장해나갔고, 내 목표를 이루는데에 도움이 될 사람들과의 만남도 잦아졌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이뤄보고자 노력하고 싶다. 향후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의 빈곤, 기후,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이러한 열망은 내가 편입을 도전했을 때처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