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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둥 May 11. 2022

2. 자기 실현

괴테 <파우스트>

다른 내용을 다 건너뛰고 제일 중요한 파우스트 2부의 5막을 보자. 파우스트는 자신이 야심차게 추구하는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노부부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해서 살해한다. 파우스트는 앞서 전쟁에 승리하고, 거대한 땅을 간척하는 자기 실현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결핍, 후회, 근심, 곤궁이라는 네 명의 잿빛 여인이 그를 찾아오게 된다. 이들로 인해 파우스는 노부부를 살해한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레트헨이 죄의식을 통해 자기부정에서 회개에 이르는 길을 걸었던 것과 반대로 파우스트는 이 감정들과 싸워서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오직 근심만이 들어가게 된다. 근심은 파우스트를 인생의 덫없음을 뉘우치고 죽음과 영생에 관심을 갖도록 종용하지만 파우스트의 자만심은 이마저도 꺾어 버린다.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 그때는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하고. / 내가 이 지상에 남긴 흔적은 /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파우스트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거두어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를 구원한다.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이게 무슨 말인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작가는 이 구원에 대한 해석을 당시의 낭만주의와 연결하여 해석한다. 당시에는 자기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인식이 통용 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시죠! 그는 학문을 위해 평생을 다 보낸 어느 날에야, 자기 안에서 들리는 진정한 내면의 외침을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오직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했지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하세계에 내려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다. /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오직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이 무차별적인 열정, 이 무참한 용기가 그를 구원한 겁니다.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정말로 언어도단인가? 파우스트처럼 불굴의 의지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불법과 편법을 넘나드는 경우는 오늘 날에도 넘친다. 범죄적인 측면을 제외한다면 수 많은 자기 개발 서적이 이런 구원을 찬양하고 있지 않는가? 누군가는 이런식의 추구함은  끝이 공허하지 않냐고 질문할 수 있겠지만 파우스트 처럼 죽을 때까지 추구한다면 공허를 느낄 여유도 없지 않을까? 참고로 내 생각일 뿐이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런 구원을 이루다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말로 무서운 구원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구원 중에 가장 무서운 구원인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매일 만나는 구원이며 가장 쉬워 보이고, 안전해 보이는 구원이며, 모두가 인정하는 구원이다. 40대의 회사원으로서 10여년을 회사에 머물다 보니 이런 구원을 이루려다 갑자기 병가를 쓰고, 휴직을 하고, 퇴사를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하나 둘 씩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된다. 나 또한 번아웃과 슬럼프를 겪었고, 얼마 전에 은퇴한 상사는 임원임에도 공황장애와 함께 퇴직했다. 우리는 왜 이런 구원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것일까? 한 번쯤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병적인 집착일까? 역사를 새로 쓰는 위대한 도전일까? 도대체 집착과 도전의 경계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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