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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둥 Aug 10. 2022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우리의 반항

알베르 까뮈 - 페스트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배경 혹은 공간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말한다. 누군가는 이 투쟁의 방식이 조화나 화합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는 전쟁일 수 있다.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지 우리는 매일매일을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투쟁해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싸움의 한 양상으로 표현되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일까? 역사 속의 어느 성인들처럼 모든 것을 초탈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매일매일 주어진 일과 그물처럼 얽혀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전쟁을 치르듯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다 단념하고 역사의 노숙자처럼 자포자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모두에게 주어진 환경이 달라 개인들 간의 삶의 비교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그 결과에 대한 성적표는 각자의 몫이 된다. 참여에 대한 권유를 들어본 적도 없이 참여하게 된 삶이라는 게임은 시작도 이상하고, 진행 방식도 이상하고, 결과도 이상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조리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런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인지능력 자체가 부조리 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삶이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인지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런 삶의 전반적인 부조리함을 페스트로 규정하고 그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자세를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를 펼쳐놓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알제리의 작은 항구도시 오랑이다. 이 도시는 자못 삭막하여 도시라면 으레 있을 법한 여러 수목들이 없다. 식물들이 없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시장에 나오는 농산물들과 날씨로 판단할 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한 도시, 즉 변화에 둔감하여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지극히 무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녹이고 있는 이 도시에 갑자기 쥐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죽어나가던 쥐들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시에서는 급기야 8천 마리의 쥐를 수거했다는 발표를 했다. 의사이자 이 ‘기록’의 작가인 리외는 쥐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쥐들의 죽음에 사람들의 불안은 증폭되기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죽어나가던 쥐들의 행렬이 어느 순간에 멈췄다. 그래서 오랑의 시민들의 불안은 한층 누그러졌다. 이것은 폭풍의 전야와 같은 고요함이었다. 리외의 아파트 수위가 갑자기 고열을 앓다가 림프샘이 부풀어 오르고 고름이 차오르더니 죽어 버렸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오랑은 순식간에 페스트에 점령된다. 코로나를 겪은 우리는 이미 경험을 했듯이 처음 전염병이 발병할 때는 그 위력을 실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페스트와 같은 무시무시한 고양이에게 그 누구도 이것에 페스트라는 방울을 달고 거기에 해당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섣부르게 주장하지 못한다. 오랑 시의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페스트가 막 시작되려 하는 시점, 즉 적극적인 초기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시의 권력자들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페스트라는 가공할만한 단어가 사람들에게 퍼졌을 때 발생할 공포와 두려움에 가득 찬 외부의 시선, 혼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페스트가 아니기라도 하면 정말로 큰 낭폐다. 시에서는 시민들에게 극도의 청결을 당부하고 환자가 발생할 경우 특별 병실에다 격리하는 조치와 소독 등 위생상의 규칙을 공표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 증가하는 사망자들로 인해서 페스트의 실체는 점점 더 확연해져 갔다. 마침내 시의 문이 폐쇄되고 오랑의 시민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모든 상황을 인고해야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

1. 종교적 접근: 파늘루 신부

갑작스러운 재앙은 사람의 빠른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상황의 판단이 저마다의 인식 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식으로 이 시절을 넘어가야 할지 선택하게 된다. 아마도 이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이 사건에 대하 해석이 아닐까 싶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답이다. 원인을 알면 해결의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전염병은 어떤 인과관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으레 종교적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파늘루 신부가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여 도시가 폐쇄되고 사람들이 갈팡질팡할 때에 남긴 설교는 굉장히 전형적이다.

“오늘날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개입하게 된 것은 반성할 시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커다란 곳간 속에서 무자비한 재화는 지푸라기와 낟알을 가리기 위해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낟알보다는 지푸라기가 더 많은 것이며, 선택된 자보다는 부름을 받는 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은 신이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성스러운 자비 위에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라면 모든 사람이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회개를 해야겠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가장 쉬운 길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남은 것은 신의 자비로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사람들 위에 그 연민의 낯을 보여주시던 하느님도 기다림에 지치고 그 영원의 기대에서 실망 하사, 마침내 외면을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광명을 잃고 우리는 이제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페스트의 원인이 우리의 범죄와 진심이 없는 회개의 반복 속에 변화되지 않는 삶에 대한 신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성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진실한 회개를 촉구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향해서 늘 이유를 듣고 싶어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답을 줄리 만무하다. 답을 그렇게만 찾을 수 있다면 삶의 부조리의 많은 부분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겸손이다. 여기서 겸손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중에 파늘루 신부도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 과연 개개인의 죄로 인해서 이런 재앙이 내려졌는지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본인이 페스트에 걸렸을 때 그 원인이 신에게 있기 때문에 의사의 치료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치료 없이 버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신의 뜻을 본인의 좁은 생각의 틀 안에서만 판단하려고 하다가 어리석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2. 회피: 랑베르

랑베르는 신문기자다. 취재차 오랑에 왔다가 페스트와 함께 감금되었다. 시의 밖으로 출입하는 모든 문이 폐쇄된 이후에 그는 자신은 이 도시의 사람이 아니기에 이 재앙과 관계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에게는 프랑스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그녀를 만나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에 건의를 하는 방식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하지만 그의 요청이 수용될리는 만무하다.

그의 주장의 결론은 여전히 자기는 우리의 도시와 무관한 사람이며, 따라서 자기의 경우는 특별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체로 그 신문기자가 만나본 사람들은 쾌히 그 점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경우가 몇몇 사람들의 처지와 같은 성질의 것이며, 그가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특수한 사정은 못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대해서 랑베르는 그것이 자기주장의 근본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의사인 리외에게 자신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리외는 지금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시청으로 가는 길에 전염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시를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된 랑베르는 코다르의 소개로 밀수꾼들이 이용하는 경로를 통해서 탈출하려고 한다. 그것은 시의 문을 파수하는 경비원들을 매수하여 탈출하는 방법이었다. 많은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만큼 위험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탈출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는 타루가 조직한 보건대에 참여하여 페스트에 대항한다. 그를 탈출시켜 줄 시의 출입문 경비원의 집에 함께 머물면서 좋은 시기를 타진하던 그에게 마침내 좋은 기회가 왔다. 그를 탈출시킬 경비원과 함께 근무하는 다른 경비원이 부재하는 밤이 생기게 된 것이다. 탈출이 임박한 그날 낮 랑베르는 마지막으로 리외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남을 것임을 말한다. 결국은 자신이 이 도시의 일원임을 인정하고 함께 대항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3. 기회주의자: 코타루

이 소설에서 제일 재미있는 캐릭터가 코타루인 것 같다. 그는 범죄 사실로 인하여 투옥될 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하려 한다. 그의 아파트 아래층에 살던 그랑이 그것을 발견하고 자살을 막는다. 리외는 그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진을 오게 되면서 코타루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자 시의 모든 행정력은 페스트를 예방하고 차단하는데 소모되게 된다. 자연스럽게 코타루와 같은 범죄자들에 대한 감시가 허술하게 되고 코타루는 페스트 안에서 사는 삶을 즐기게 된다. 연금생활자이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한 편이 아님에도 그는 밀수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게 되고 그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좋은 평판도 덩달아 얻게 된다. 페스트 속에서 유일하게 삶의 활력을 얻고 살게 된 사람이다. 그는 페스트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랐다. 페스트의 기운이 점점 사그라지는 시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페스트의 확산세가 꺾인 것이 일시적 일지 아니면 소멸로 가는 것인지 물어보고 다니기도 했다. 페스트가 끝나자 경찰이 그를 체포하러 오게 되고 그는 총격전을 벌이고는 죽게 된다.

 

4. 대항하는 자: 리외

페스트가 시작되기 전에 리외는 아픈 아내를 멀리 요양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리외의 어머니가리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방문한 상태였다. 아픈 아내를 보내고, 아들의 생활을 돕기 위해 어머니가 찾아온 상태에서 주인공은 페스트를 맞았다. 쥐들이 죽어 나가는 양상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나가는 일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 밖에 일이 터졌다. 가장 먼저 시의 공무원들에게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공무원들은 소요가 두려워서 망설였고 그것은 시에 소속된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페스트는 창궐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 보다도 의사의 역할이 막중하다. 오래전에 중국에서 페스트를 경험한 적이 있던 늙은 의사 카스텔은 혈청을 제작하는 노력을 하게 되고 리외는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소설 중에서 리외는 한결 같이 의사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야말로 우직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아무리 피곤하고 병의 확산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좀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병이 퍼지기 전에는 의사는 치료해주고 회복시켜 주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전염병이 퍼지고 난 후에 의사의 역할은 병을 진단하고 격리를 지시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가족 간의 이별을 뜻하게 되고 환자와 분리 격리되는 가족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볼 수도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라는 존재는 기피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일 자체의 과중함과 불안함, 환자들의 기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단함이 이 직업 속에 있다. 그럼에도 리외는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별다른 불평 없이 지속하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단호히 인정하고, 결국에는 쓸데없는 공포감을 쫓아버려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페스트는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요, 또는 그렇게 생각되었더라도 대책이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그것은 가장 가능성 있는 일이다―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에 먼저 대비하고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리외 자신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애쓰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 싸움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싸우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상의 질서는 죽음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이상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우러러볼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겁니다. 그뿐이죠.”
리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늘 그렇죠. 나도 그걸 알아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의미인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외가 말했다. “끊임없는 패배지요.”

계속해서 죽음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점점 무감각해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동요는 본인에게도 환자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무감각에 편승해서 일을 하고 있는 리외에게도 극도로 감정이 격앙 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예심판사 오통 씨의 아들이 죽는 순간이다. 가망이 없는 이 소년에게 카스텔이 처음으로 만든 혈청을 주입해서 그 효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죽게 된다. 소설에서 페스트의 절정을 보여주는 순간이 이 부분이다.

어린애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그 주변의 환자들까지 흥분했다. 아까부터 줄곧 방의 저 끝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던 그 환자는 앓는 소리의 리듬이 빨라지더니 마침내는 그도 역시 정말 비명을 지르게 되었고, 한편 다른 환자들도 점점 큰 소리로 신음하기 시작했다. 밀물 같은 흐느낌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 파늘루의 기도 소리를 뒤덮어버리고 말았으며, 리외는 침대 모서리에 매달린 채 피로와 혐오에 취한 듯이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타루가 곁에 와 있었다.
“나는 가봐야겠어요” 하고 리외가 말했다.
“더 참을 수 없어요.”
그러나 갑자기 딴 환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의사는 어린애의 비명이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 비명은 점점 더 약해지더니 급기야는 멎어버렸다. 그러더니 그의 주위에서 비탄의 소리들이 나지막하게, 이제 막 끝난 그 싸움의 머나먼 메아리와도 같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싸움은 끝난 것이었으니 말이다. 카스텔은 침대 저쪽으로 가더니,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고 말했다. 어린애는 입을 벌린 채로, 그러나 말없이 흐트러진 이불의 움푹 들어간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을 남긴 채로 누워 있었다.…그러나 리외는 이미 방에서 나가고 있었는데, 그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빠르고, 파늘루 곁을 스쳐 지나갈 때 파늘루가 그를 붙잡으려고 팔을 내밀었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태도였다.
“여보세요, 선생님” 하고 그가 말했다.
리외는 여전히 골이 난 태도로 몸을 돌리더니 격렬한 어조로 내뱉었다.
“허, 그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어른들의 죽음은 파늘루 신부의 설교처럼 죄 때문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런 어린아이의 죽음은 이해도 용납도 어려운 것이다. 리외는 신에 대한 원망을 파늘루 신부에게 쏟아낸다. 작가가 생각하는 부조리의 극치가 여기에 표현된 것이라 생각된다.

 

5. 대항하는 자: 타루

페스트는 전염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반면에 페스트를 이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협력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이 타루다. 그의 직업을 굳이 말하자면 사회운동가 정도가 맞을 것 같다. 그가 어떻게 해서 오랑에 오게 되었고 호텔에 머물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본래 이 도시의 시민도 아니었던 자가 페스트가 발발하자 보건대를 만들어 의료진 외에 사람들을 모아서 페스트에 함께 대항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보건대는 확진자들의 수용소 관리를 담당하고 치료 이외의 다양한 역할들을 행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페스트와 싸우는 역할을 한다.

그는 검사인 아버지가 재판장에서 죄수에서 사형을 구형하는 모습을 보며 이 세상에 이미 퍼져있는 페스트에 대해서 인지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한 사람을 정의의 이름으로 죽임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생각을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 자체가 그에게는 페스트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그의 방황이 시작되었고 결국 집을 나오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자신이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그 자신이 타인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페스트 간염자 중 하나였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벗어난 다른 모든 가치들을 박멸해야 하는 적으로서 규정하고 탄압하는 작가 생전의 냉전시대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 나는 그야말로 내가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페스트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적은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몇천 명 인간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한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善)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조차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목구멍이 착 달라붙는 것처럼 괴로웠어요. 나는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로웠어요. 내가 나의 불안감을 표시할라치면 그들은 나에게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고, 흔히 감동적인 이유들을 내세워 아무리 해도 소화되지 않는 것을 나로 하여금 삼켜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저 거물급의 페스트 환자들, 붉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 역시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만약 내가 불가항력이라는 이유로 군소 페스트 환자들이 주장하는 요구를 용인한다면 거물급들의 요구도 물리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이 옳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곧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 양보한다면 멈출 필요가 없다고요.

페스트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 사람은 페스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게 된다. 문제는 전염병 페스트와 사투를 벌이는 것이 정말로 힘든 것처럼 사회적 페스트와 대적하는 것도 정말로 힘든 일이라는 것에 있다. 전염병 페스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거나 건강해지거나 하는 뚜렷한 징후라도 있지만 사회적 페스트는 보이지도 않는다. 인지할 수 없는 상대와의 싸움은 나 자신에 대한 항상 긴장된 의식을 요구하고 이 상태의 피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외,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간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밖의 것, 즉 건강, 완전함,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훌륭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코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선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타루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페스트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해서 죄 없는 살인자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페스트에 감염된 자와 감염되지 않은 자 외에 제3의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의사의 범주로 마음에 평화에 도달한 자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은 ‘공감’이라고 타루는 언급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이 부분이다.

‘삶은 부조리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 부조리 속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일단은 이 사실을 인지하자. 맹목적인 사상의 조류에 휩쓸려서 자기도 모르게 살인자가 되지 말고 약간은 방관하는 자가 되어 한 걸음 물러서서 보자. 무엇이 확실히 옳다는 논리를 경계하자. 그 논리를 통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공감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자. 이 부조리함을 깨어 부술 수는 없고 타루의 운명처럼 나중에는 페스트에 걸려서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투쟁을 하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완전히 이 책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정리하자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6. 대항하는 자: 그랑

이 책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연민을 자아내는 사람이 그랑이다. 그는 시의 서기일을 하고 있었다. 젊을 때 시청에 들어왔지만 오랜 시간 일했음에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혼도 했지만 아내는 그를 떠나 버렸다. 낮에는 시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먼 미래에 소설을 완성해서 출판사에 넘겼을 때 이 글을 읽은 편집자가 갑자기 일어서 경의를 표하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설이라는 것이 한 가지 표현을 계속해서 고치는 수준이지 정확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문장을 몇 달째 고치고 있는데 그것이 소설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랑은 보건대에서도 사망자의 통계를 기록하는 서기 역할을 한다. 그는 낮에는 시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이렇게 자신을 시간을 할애해서 이 일을 했다. 현실에서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의 하나인데 작가는 그를 이 페스트 속에서 영웅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인 리외도, 보건대를 이끄는 타루도, 종교적 리더인 파눌루 신부도 아닌 이 평범한 한 사람에게 많은 중요도를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페스트가 발발했을 때 제일 피해를 보는 계층이 이러한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페스트라는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길이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의 작은 힘이 모여서 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랑은 마지막에 페스트에 걸리게 되지만 결국 페스트를 이기고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나름대로 작가가 제시한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이른바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 놓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 그런 존재가 꼭 필요하다면, 필자는 바로 이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영웅,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다소의 선량한 마음과 약간의 고운 마음씨와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없는 그 영웅을 여기에 내놓는 바이다. 이로써 진리는 그 진리 본연의 자리를,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라는 합계를, 그리고 영웅주의는 제2위라는 본래의 자기 위치, 즉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그 앞에 놓일 수 없는 그의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이 기록도 자기의 성격, 즉 선량한 감정, 말하자면 두드러지게 악하지도 않고 또 흥행물처럼 야비하게 선정적이지도 않은 감정을 가지고 이루어진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페스트는 늘 존재한다.

마침내 페스트가 종식되었다. 랑베르는 헤어져 있던 아내와 만났고 저마다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페스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타루에게 페스트의 징후가 나타나게 되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그가 원하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지만 그것이 필요 없게 되어 버렸다. 또한 리외는 요양원에 보냈던 아내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결국은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페스트 시절을 정말로 빨리 망각하게 된다. 현실의 슬픔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그리고 어두웠던 과거를 부정한다.

그들은 우리가 한때는 경험했던 저 얼빠진 세계, 사람 하나 죽이는 일쯤은 파리 한 마리의 죽음 정도로 여겼던 그 무지한 세계, 저 뚜렷이 규정받은 야만성, 온갖 미치광이 짓, 현재의 일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가졌던 무시무시한 자유의 감금 상태, 제풀에 죽어 넘어지지 않는 모든 자를 아연실색하게 하던 저 죽음의 냄새 등을 침착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매일매일 어떤 사람들은 화장터의 아궁이에 켜켜이 쌓여서 이글거리는 연기가 되어서 증발해버리고,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무력함과 공포의 쇠사슬에 묶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그 어리벙벙한 민중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페스트가 끝나고 리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왕진을 다닌다. 왕진 길에 늙은 병자가 타루의 안부를 묻는다. 리외는 그가 죽었음을 알리자 노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잠시 후에 노인이 말했다. “언제나 제일 좋은 사람들이 가버리는군요. 그게 인생이죠. 하지만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죠.”…“괜히 그러죠. 그분은 그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어쨌든 나는 그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 이 모양이 되었죠. 딴 사람들은 ‘페스트입니다. 페스트를 이겨냈습니다’ 하고 난리를 치죠. 좀더 봐주다간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뭡니까?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살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좀 잡을 수 없는 일이다. 좋을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극심하게 힘들 때도 있으며 무료할 때도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잔물결 같은 것일 테지만 모든 상황이 나를 억압하는 시절에 그런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다. 부족한 지혜로서 현상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해야 하며 적절히 스스로 삶의 방향 수정도 해야 한다. 삶은 어딘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위기에 대해서 예측이 아니라 대응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조금씩 태도를 다듬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인 듯싶다. 오늘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뜨고 깨어 있을 것,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것, 타인에게 영웅이 되는 일영웅에게 맡기고 나는 내 삶에서 영웅이 되어 그랑이 한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작은 선의를 가질 것.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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