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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출한 추석

by 피닉스

엄마가 하늘로 떠나고 다섯 번째로 맞는 추석이 돌아왔다. 3남 1녀의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여자인 내가 명절마다 매번 음식을 만들어 간단한 제상을 차린다. 기독교 집안이라 제상이랄 것도 없고 그냥 가까이 사는 남매들과 아버지가 모여 간단한 기도를 올리고 먹는 밥상이라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남매들은 여건상 절반은 불참하기에 양은 많지 않지만 혼자서 생선과 나물 다섯 가지와 두어 가지의 전 탕국 등 구색을 맞춰 장만하자면 한 달 전부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엄마 생전에는 해산물이나 건어물상이 즐비한 전통시장에서 종종걸음 치며 공수해 온 신선한 식재료로 사랑과 정성으로 빚은 음식을 그저 얻어먹거나 80% 이상 완성된 음식을 조금 거드는 식으로 얻어먹곤 했는데 양이 많고 적고, 맛있고 맛없고 간에 내가 구색을 맞춰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한 두 달 전부터 걱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오빠는 장남으로서 제수 음식을 나에게만 전적으로 전가시키는 데에 대해 미안한 마음인지 제수 음식 전문집에서 맞춤으로 하자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사실 비용보다도 신선도와 재료의 질을 믿을 수 없어 내가 하겠노라 자처했다.


엄마의 부재 후 첫 명절은 남동생이 사 온 제수음식 중 두부 전이 보관 부주의 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신선도가 떨어진 재료였는지 시큼한 맛이 났었던 적이 있었던 터라, 시중 제수 음식에 대한 신뢰성에 적잖이 실망을 한 전적이 있어 더더욱 내가 손수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고 있지만, 명절 아니면 좀처럼 아버지댁에 오지 못했다. 한해 한해 눈에 띄게 기력이 달리고 노쇠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가슴이 저려온다. 30여 년 전부터 배드민턴 클럽에서 선수로 대활약하며 각종 단체전과 개인전에 출전하면서 크고 작은 트로피와 상장을 휩쓸었던 건장하고 날쌨던 아버지가 어느새 허리는 90도로 꺾이고 다리는 O자로 휘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마치 돌박이의 걸음마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마른명태 같은 보잘것없는 육신이어도 흰머리 한올도 남에게 들키는 걸 싫어할 만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검은 머리 한올 없는 백발로 계시는 게 낯선 충격으로 다가왔고, 황량한 가슴에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고 손도 목소리도 떨려서 누가 봐도 노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도 윤기 좔 좔흐르는 검은 머리만을 고집해 엄마와 나의 눈총을 받던 아버지였기에 그 변화는 사뭇 충격이었다.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나와 엄마의 협박성 발언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머리만 검다고 젊어 보이냐는 한숨 섞인 타박에도 눈하나 깜짝 않던 아버지가 80 중반이 되어서야 머리가 검은색이어도 더 이상 젊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걸까? 아니면 점점 쇠약해진 몸이 무기력이란 불청객을 초래한 걸까? 어느 쪽이든 가슴이 시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기억하건대 집안의 내력인 유전적인 요인으로 30대 초반 청춘일 때부터 아니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20대부터 염색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으니 어언 60년 이상을 한결같이 꽃 단장해 온 멋을 쉽게 포기하실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마음이 아려온다.


늙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무언가에 대한 대한 열정 그리고 용솟음치는 욕구와 욕망이 사그라들고 그 틈으로 무기력과 나약함이 비집고 들어오는 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몇 달 사이에 부쩍 더 수척해지고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며, 식탁에도 겨우 앉으시는 모습에 내 몸이 물속으로 끝도 없이 침잠해 가듯 먹먹한 마음이다.


아버지가 제상 앞에서 절 대신 항상 대표 기도로 마무리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절을 올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허수아비가 된 쇠약한 모습 앞에 감히 기도 요청도 못 드릴 지경이었다.


제상을 물리고 식사 후 4남매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묘에 성묘를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는데 차가 많이 밀려 못 간다는 거짓말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들만 빠져나간 것도 처음 겪는 낯선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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