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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택의 쿼카 Mar 04. 2023

#1. 어쩌다 나는 심판의 글을 쓰게 되었을까

글이 삶을 돌보는 여정의 시작



  이 지긋지긋한 공장.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꼬박 2시간이 걸려 출근한 이 공장. “짬밥”이라고 불리는 점심, 저녁을 여기서 해결하고 야근까지 여기서 하다니.

공장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회사’라는 느낌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자리에 변변한 모니터 하나 없는 이곳은 마치 창고 같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제품 박스, 창문을 타고 흘러오는 공장 폐수 냄새는 안 그래도 좋아하기 힘든 이곳을 더 있기 싫게 만든다.



“엄마, 아빠 나 취업했어.”



  이 한 마디로 부모님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10년 만에 두 번째로 보이셨다. 첫 번째는 내가 외고에 합격했을 때. 우리 딸이 그렇게 가기 힘든 외고에 들어갔다며 그간 사이가 소원해진 친구에게까지 전화를 돌리던 부모님이었다.



  “얘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데~, 내가 괜히 미국 유학시킨 게 아니라니깐.” 외고에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 유학 2년 반 경험이 맞긴 하다. 그렇지만, 신께서 내게 “다시 돌아가서 외고 갈 수 있긴 한데 미국 갈래?”라고 물으신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세차게 저을 것이다.



  아시아인이 총 10명도 안 되는 미국 동부의 한 가톨릭 학교는 무교의 13살 한국 여자애인 내가 지내기엔 너무 아픈 곳이었다. 엄마가 가끔씩 점심으로 싸 준 김치볶음밥은 피자와 맥 앤 치즈만을 접해온 우리 학교 친구들에겐 냄새가 생소하다 못해 불쾌했을 것이다. 별 뜻 없이 내뱉었을 그들의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나?”는 내가 도시락 뚜껑을 열지말지 고민하는 계기로 발전해 마침내 쿨하게 점심을 스킵하게까지.



  점심뿐이랴. 산수에 능한 한국인이 매 번 손쉽게 받는 수학시험 100점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다. 뻔뻔하게 수학 숙제를 부탁한다며 내 책상에 부메랑 던지듯이 휙 던졌던 수학 워크북. 20년이 지난 지금, 기억이 미화될 법도 하지만 아직도 그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내면에 살고 있는지 미국으로는 여행조차 가고 싶지 않다.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엔 외고 입학 후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곧잘 한다고 생각하던 영어는 미국에서 태어난 친구들, 중2 때 이미 토플만점을 받은 외고 친구들 앞에서는 초등영어 수준이었다. 어디 영어뿐이랴. 순진하게도 외고에 들어가면 다 같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줄 알았다. 프랑스어 기초를 이미 배우고 선행학습까지 끝내고 온 우리 과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작아지다 못해 스스로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웬만큼 머리가 커져 스스로를 사냥하는 것은 자기 계발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고1 때부터 시작된 전략과 보호자 없는 ‘자기 사냥’은 자기혐오를 낳다 못해 나 자신을 놓아버리게까지 만들었다.



  여기서 스스로를 놓아버렸다는 것은 학생인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냥 안 했다, 공부를. 오목교역 4번 출구에서 나눠주던 전단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목동 대형학원에 앉아 있으면서, 숙제도 공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고생이니까 공부를 잘하는 친구겠거니 환영하며 받아줬던 학원 원장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누가 잠깐 나의 머리를 빌려가 나는 지금 머리가 없는 상태인 것처럼. 아빠가 회사에서 심하게 깨져 정신과 상담을 예약하면서까지 버는, 엄마가 다리가 퉁퉁 부을 만큼 일해서 번 돈을 학원비에 꼬라박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말이다.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모든 상황과 나 자신이 ‘무관하다’. 이런 걸 보고 누군가는 현실 감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보낸 학창 시절의 결과는? 사수 끝에 겨우 진학한 서울의 한 대학교의 작은 과였다.



  외고를 나왔으니 주변에 얼마나 스카이가 시글시글하겠는가. 옆반의 걔는 서울대, 나랑 몇 마디 나눴었던 걔는 연대. ‘내가 다시 들어가서 보면 사람이 아니다’하며 굳게 다짐하고 비활성화했다가 또 굳이 잊어버린 비밀번호까지 찾으며 들어가서 보곤 했던 인스타. 그 속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은 연고전이네 고연전이네 하며 행복하게 싸우고 있었다. 부러움을 인정하기 싫은 나머지 ‘꼴 보기 싫네... 내 무덤을 내가 팠지.’하며 또 인스타를 정성스럽게 비활하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식 전 날, “나는 네가 그래도 사수는 해서 스카이는 갈 줄 알았어”라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는 엄마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엄마, 아빠의 학벌 콤플렉스를 왜 자식인 나한테 풀어?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이라고.” 성난 침팬지처럼 화를 씩씩 내며 집을 나갔다. 근처 24시 카페에 있다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그날 이후, 집에서 ‘대학교’ 단어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띠링.

“ㅇㅇ대학교에서 보낸 등기를 우편함에 보관하였습니다.”


  교양 수업 중 받은 문자 하나.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오후에 수업이 아직 2개나 더 남았는데 어쩌지, 그냥 수업 가지 말고 집으로 가서 등기부터 숨길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결석을 많이 한 오후 타임 수업을 또 빠지면. 낙제를 받을 위험이 있었다. 잘근잘근 불안에 떨며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튀어갔다. 누군가는 날 보며 급똥이 와서 화장실 급한 사람으로 보겠구나, 싶을 정도로 서둘렀다.  



  우편함을 열었는데, 세상에, 없다. 등기가 없다. 어디 갔지?



  아파트 3층인 집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거의 네발로 가듯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혹시나 기사님이 우편함을 문 앞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희망에 차서 봤지만, 없었다. 손이 하도 떨려 집 비밀번호를 눌렀는데도 한 번 틀리고, 다시 눌러서 들어간 집. 현관문에 놓인 아빠 구두가 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퇴근하셨을까.



  “딸, 학교 갔다 왔어? 학교에서 뭐 왔더라. 너 방 책상 위에 올려놨어.”


  “응. 고마워. 학사일정 공지문인가 봐. “


  묻지도 않은 등기의 정체를 혼자 주절주절 말하며 내 방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등기의 정체는 직전 학기에 받은 학사경고장이었다. 4.5점 만점에 평점 1.6점. F 2개와, C와 D로 범벅된 성적표.

그랬다. 나는 여전히 생각 없이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아빠가 학사경고장을 못 봐서 천만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봤으면 난리 났겠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을까. 집으로 날아온 학사경고장은 홍대역 지하철 화장실 변기에 조각조각 찢어 물내려 버렸다.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도 흘려보냈다.


  “저녁 고기 어때? “

  “좋지. 소고기야? 돼지고기면 안 먹고.”


  소고기 집에서 혼자서 1.5인분은 먹어 치우고 이제 물냉면으로 마무리해 보려고 호출벨을 누르자마자 아빠가 건넨 말.


  “학사경고 봤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혹시 학폭 당하는 건 아니지? “


  학사경고장을 봤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내가 폭력을 당할까 봐 걱정한다는 것은 더 놀라웠다. 아빠가 날 걱정하다니. 걱정의 소재가 ‘나의 불투명한 미래’가 아니라 ‘나의 안위’라니. 스스로가 걱정을 끼치는 자식인 걸 알면서도 걱정을 받을 ‘자격’이 과연 내게 있나라는 의구심을 품어왔었다. 외고 이후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해 드린 적이 없으니, 이제 그들은 나에게 기대나 걱정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하게 지레짐작한 것이다.


  “무슨 학폭이야. 학교에 좋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인싸야.”

“그럼 됐어. 나는 네가 건강하고 밝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내 자식이어서 가장 고맙고.”


  시켜놓은 후식 물냉면은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채. 뚝뚝 흘린 내 눈물은 냉면 국물에 들어갔다. 식초와 겨자 대신 눈물이 들어간 냉면이라니.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수업 앞자리로, 늘 아슬아슬하게 수업시간을 맞춰가는 것이 아닌 적어도 수업 15분 전에는 착석으로.

<태도>를 바꾸니 성적은 저절로 따라왔다. A+를 몇 번 받아보니 수업 장학생도 어렵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어 대외활동과 자격증도 부지런히 챙겨서 쌓았다. 잠이 부족해도 이상하리만큼 상쾌했다. 운이라는 무지막지한 친구도 같이 날 믿고 같이 따라와 준 덕에 대학동기들 중 가장 빨리 취업에 성공했다


  그렇게 취업 성공은 부모님에게 두 번째로 선보인 ‘성취’였다. 이제부터 내 밥벌이는 내가 할 테니 더 이상 내 앞가림이나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안심시켰으니 말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어떻게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겠는가. 남자들밖에 없는 팀에서 아예 적응을 못하고 있다, 서울 사는 데 평택으로 출퇴근하기 죽도록 힘들다 등 - 못 참고 말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펜을 잡은 순간부터 첫 번째 타자로 그날 오전에 이어폰을 집어던지며 성질을 냈던 사수가 심판대에 올랐다. 글을 쓰면서 그와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감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그는 ‘악질’에서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삶은 글을 낳고 글은 삶을 돌본다.” - 은유


  글이 삶을 돌보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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