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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Sep 26. 2023

나의 삶은 내가 아니다.
그저 "나의 삶"일 뿐이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가를. […]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 예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 정신이 더 이상 주인, 그리고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세 변화에 대하여」_책세상  


  지금까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삶이 좀 더 편해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문제점을 찾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에 귀 기울이며 그 ‘너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찾으려했었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말을 의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벗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단지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내가 너무나 쉽게 동요되고 생각을 바꾸는 것에 미안함을 느낄 때가 많다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그 모든 말대로 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행하지 않거나 그리하지 못했을 때에는 죄책감의 무게를 견뎌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학습된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에서 나의 욕망들이 발현되었고, 그 욕망은 새로운 '너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낳았다. 그리하여 지금 나의 정신은 수많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짐들을 지고도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더 무거운 '너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등에 실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나를 지배한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의 정체는 ‘긍정의 힘’이었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나 자신조차 긍정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했던 나의 시도는 실패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하는 것은 옳고(또는 좋고), 하지 않는 것은 그르다(또는 나쁘다)는 이분법이다. 나는 너무나 강력하게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이분법에 물들어 있다. 그러한 이분법에 의해 내가 좇았던 보편적인 모든 가치들이 내게 준 것이라고는 결핍과 공허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새로운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좇고, 다시 좌절했다. 이 반복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정신도 한때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더없이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더없이 신성한 것에서조차 망상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세 변화에 대하여」_ 책세상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치들 중에 망상은 무엇이 있는가? 가장 강력한 것으로 ‘인정욕구’가 있다. 내가 보편타당한 가치를 따름으로서 얻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타인에 의한 인정욕구의 충족이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차선책으로 매달린 것이 ‘보편타당한 가치에 미치지 못한 나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라는 또 다른 이름의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였다. 그렇다면 사자의 정신이 할 일이란 ‘인정욕구’는 나쁜 것이니 버려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하려는 긍정은 노예의 긍정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렇게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이분법은 니체적인 해석이 아니다. 니체는 이분법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사자의 정신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등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한 것으로 충분히 그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사자의 정신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세 변화에 대하여」_ 책세상


  내가 그토록 채우고 싶어 했던 인정욕구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망상이며, 그것을 위해 좇았던 보편적 가치들은 ‘허구’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어린아이가 되라고 했을까? 어린아이는 허구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놀 줄 알기 때문이다. 순진무구,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신성한 긍정인 아이는, 그것이 무엇이든 제 손에 들어오면 새로운 놀이를 발명한다.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만 가지 놀이 방법을 발명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이루고 싶은 가치는 ‘이 에세이를 무사히 시간 내에 마칠 뿐 아니라, 정샘(이 에세이 과제를 내준 서양철학사 강사)의 피드백 내용이 조금이라도 적용되어, 정샘에게 보람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은 금요일 저녁 6시53분을 지나는 중이다. 내가 만일 이 가치가 좋은 것이라 규정짓고 이것을 좇으려 한다면, 나의 의지는 욕심이 되고 욕심은 초조함을 불러,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어떠한 문장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밤10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의 정신은 어린아이가 된다. 이 아이가 선택한 놀이는 ‘내년에 다시 만난 정샘이 내가 올해보다 더 많이 니체를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준이 되는 에세이 완성하기’이다. 그리고 7시가 지나면서 빨라진 맥박수 세기 놀이, 시간 내에 마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마저 스릴로 즐기는 거다. 하나 더 예를 들자면, '나는 날씬해져서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발현된다면 그것을 외모지상주의라 비난하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되어 놀이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 먹기 놀이, 식사 후엔 산책놀이, 아침엔 스트레칭 놀이, 회사까지 걸어가기 놀이. 그리고 하나의 놀이에서 또 다른 여러 가지 놀이를 창조할 수도 있다. 회사까지 걸어가면서 하늘 보기 놀이, 가로수의 변화 알아채기 놀이, 언덕을 오르는 수레 밀어주기 놀이 등등 그 확장은 무한하다. 또 그럼에도 줄어들지 않는 체중을 확인하게 된다면 정샘과 시소를 타면서 샘이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 놀이를 즐기면 되는 것 아닐까?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삶의 모든 순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즐기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신성한 긍정’일 것이다. 이렇게 매 순간을 극복하는 것이 니체의 ‘위버멘쉬이다.    

   

  “위버멘쉬가 지상의 의미[Sinn]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 있는 밧줄이다.『서양철학사2』_ 이학사


  위버멘쉬는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를 잇는 밧줄일 뿐이다. 하나의 가치를 넘어서 극복하게 되면, 또 다른 넘어설 가치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설파한 모든 것의 영원회귀가 그것이다. 모든 것이 무한한 주기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 이론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공포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나는 살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에 갈 수도 있는 잘못’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회개할 방법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방법이 진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옥은 무섭다. 그런데 이번 생의 끝이 그저 주사위 한 판에 불과하며, 그것이 끝나면 새로운 주사위 놀이가 기다리고 있다니 한결 자유롭다. 그렇다고 다음 판이 있으니 이번 생을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두 번째 측면, 즉 새로운 의미, 새로운 조합, 새로운 배움의 차이를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삶의 ‘최상의 형식’을 찾아낼 수 있고 무수한 생성과 차이의 반복을 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만 삶에 대한 저주와 부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 한 사건을 겪을 때마다 그 사건이 영원히 반복해서 돌아오기를 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다시 말해 그럴 정도로 삶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매 순간을 창조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니체강의』_북튜브


  지금까지 나는 ‘지금의 나’와 달라지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 순간의 ‘나’를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정했던 그러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나의 삶’이 있었을 뿐이다. 니체도 사람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 목적이 아니라는 것『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_책세상 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이 사건(삶)을 어린아이가 놀이방법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순간으로 만들고, 그 삶을 사랑하겠다. “아모르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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