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화예술 메세나 현황과 사례
한일 문화정책&예술경영의 유사성
한국과 일본의 예술경영&문화정책 분야는 공공지원 중심으로서 지원기구, 정책의 대상인 문화시설과 운영방식, 운영인력 등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여 왔다. 일본의 사례는 그동안 우리에게 다양한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최근 국내에서는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의 일본 사례를 참고하기도 한다. 새로운 문화정책의 주체로서 민간의 지원이 강조되는 가운데, 우리보다 먼저 뿌리를 내린 문화예술 메세나 활동 역시 일본의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한일 양국 문화정책이 주로 공공의 영역에서 국가 및 지자체의 책무와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점을 고려한다면, 문화예술 메세나 활동은 그야말로 민간의 예술경영적 측면이 강조된다. 우리보다 앞서 경제성장과 함께 메세나 활동이 두드러진 일본의 현황과 사례를 살펴보면 향후 국내의 과제와 미래 전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본 고에서는 일본의 문화예술 메세나 활동의 역사와 현황, 대표적인 기업들의 메세나 지원 사례, 사회적 가치와 함께 하는 메세나의 새로운 방향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근거한 메세나의 태동
일본의 기업과 상공인을 통한 문화예술 후원은 생각보다 긴 역사와 전통이 있다. 에도 막부시대부터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이들은 개인적으로 일본 전통 예능(藝能) 지원을 시작한다. 에도(江戶) 시대 거상(巨商)에 의한 문화예술 지원 전통은 메이지(明治) 시대에 이르러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근대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일본은 많은 기업이 설립되기 시작하고, 기업의 설립자가 후원자로서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사례가 초기에는 음악과 미술에 집중되었다. 음악가에게 금전적 지원을 하거나 미술작품을 수집한 사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가의 수집된 컬렉션을 바탕으로 설립된 민간 미술관, 박물관은 현재 일본 문화정책의 한 주체로서 위치 설정을 하고 있다. 기업가 개인이 아니라 기업 자체가 서양 예술의 소개를 통해 문화예술 지원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사례도 일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경제성장과 함께 한 기업 메세나 활기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기업들이 문화예술 활동 지원과 문화사업에 직접 관여하게 되며, 초기 단계의 본격적인 기업 메세나 시대를 열게 된다. 대표적으로 신문사와 백화점이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다. 1980년대 이른바 버블경기와 함께 제품 홍보를 위해 문화예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언론사와 제휴하는 기업이 급증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언론사들이 해외의 유명 오페라하우스와 클래식 음악회를 주최하면 이에 대한 후원, 협찬을 기업들이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세이부 백화점을 운영하는 세이종 그룹 역시 문화예술을 적극 활용하였다. 미츠코시와 다카시마야 같이 유서 깊은 백화점과 달리 후발 백화점인 세종그룹(Saison Group)은 젊은 고객층을 유치하기 위해 전위예술과 현대미술에 주안점을 둔 세종 미술관을 통해 문화사업을 전개했다. 1990년대 공공 문화시설의 해외 프로그램 공급을 주로 담당했던 국내의 언론사 문화사업 및 백화점 문화사업은 일본의 초기 사례와 유사했다 할 수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정책학자 코토 카즈코(後藤和子)는 이러한 일본의 기업 메세나 경향, 즉 기업명을 전면에 내세운 콘서트를 ‘관(冠) 콘서트 현상’으로 명명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광고 홍보 효과를 노린 ‘관 이벤트’가 아니라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문화예술 지원책에 대한 기업 공헌인 메세나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1990년 기업메세나협의회(企業メセナ協議会)가 출범하면서 기업 메세나의 보급, 연구조사, 컨설팅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시세이도, 세종, 와코루, 산토리 등 대기업의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협의회 발족은 주목받게 되었으며, 회원사 역시 190개 사를 넘어섰다. 협의회 발족과 함께 ‘메세나 운동’은 지역과 중소기업의 활동으로도 확대되었다. 또한, 경상이익의 최저 1%를 사회공헌에 활동하려는 ‘1% 클럽’도 발족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한편, 1994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경제와 문화예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목적으로 국내에서도 한국메세나협회가 설립된다.
지역과 시민으로 확대되는 메세나 활동
일본의 메세나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지역을 중심으로 시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사실, 기업 선전이나 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한 문화예술지원은 현실적으로 문화예술의 공공성, 지역성, 사회성에 근거한 기업 활동으로 이어지는 데는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9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형태의 메세나 활동이 대두되었다. 우선 지역이 주도하는 메세나 활동이 눈에 띈다. 예컨대, 인구가 체 20만도 되지 않는 야마구치시의 야마구치 메세나 클럽(山口メセナ倶楽部)은 지역 상공회의소 멤버의 기업과 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직으로 1994년에 설립되었다. 지역 최초로 설립된 야마구치 메세나 클럽에서는 창설 이래 꾸준히 지역의 고유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지역 예술·문화 활동을 조성·지원하고 있다. 회원은 지역의 기업, 개인으로 구성되어 각각 매월 1만 엔(한화 10만 원)을 회비를 출연하고 있다. 지난 15년간 260건 4,800만 엔(한화 4억 8천만 원) 남짓의 조성 실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연간 300만 엔에서 600만 엔의 사업 조성이 꾸준히 행해지고 있다. 원칙적으로 연간 공모를 시행하며, 연 4회(6·9·12·3월) 심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지원 여부와 금액을 결정한다. 비록 지원 금액은 소액이지만 지역의 상공회의소와 시민이 주축이 되어 지금까지도 지속해서 꾸준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야마쿠치 메세나 클럽은 지역문화진흥과 문화예술을 통한 마을 만들기는 지역의 기업과 시민이 함께해야 한다는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기업 메세나의 상징, 산토리(Suntory)
일본의 메세나 사례를 소개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는 기업이 있다. 바로 산토리 위스키와 하이볼로 유명한 주류기업 산토리(Suntory)이다. 주류 제조·판매 산업의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동사는 사회공헌을 근저로 하는 경영 철학으로도 유명한 기업이다. 산토리는 일본 고도 성장기인 1960년부터 선도적, 체계적, 전문적으로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미술과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예술지원에 힘을 쏟고 있다. 1961년 '산토리 미술관' 시작으로 1986년 '산토리 홀'을 개관했다. 창업 110년을 맞이한 2009년에는 기업의 예술 공헌 활동의 전문기관으로 공익재단법인 산토리예술재단公(益財団法人サントリー芸術財団)을 설립하였다. 재단은 음악·미술 등에 관한 공연, 전시회, 강습회 등의 문화사업을 직접 기획한다. 또한, 음악·미술에 관한 출판물의 간행과 우수한 음악·미술 활동에 대한 표창 사업, 일본인 작곡가 활동 장려를 위한 지원사업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물론, 산토리 홀과 산토리 미술관 운영을 통한 클래식 음악 진흥 및 미술품의 수집, 보관, 연구 역시 재단의 주요한 대표적인 고유 목적사업이다.
한편, 전 세계 클래식 팬들에게 산토리사는 산토리 홀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1980~90년대에 일본은 클래식 음악을 위한 콘서트 홀 건설 붐이 일어났다. 산토리 홀(サントリーホール)은 그중 하나로 오사카 심포니 홀과 함께 일본 클래식 전용 홀을 대표하는 공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제 카라얀이 산토리 홀의 자문에 주요 역할을 당당했으며, 그에게 ‘음향의 보석상자’라 칭찬받으며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콘서트 홀로 자리매김했다. 산토리 위스키 생산 60주년 기념으로 1986년 10월 12일, 일본의 첫 번째 클래식 전용 홀로 개관한다. 그동안 산토리 홀에서는 세계적인 음악인과 오케스트라 콘서트, 리사이틀, 오페라 콘서트, 재즈 등이 공연되었는데, 특히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깊은 관계로 인해 매년 특별한 콘서트 시리즈를 공연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20년의 일본 경제 장기불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세계 최정상 음악가들의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베네세 그룹, 기업 메세나 활동의 사회적 목적의식
구글 검색 알고리즘에 있어 ‘예술과 섬’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나오시마(直島)와 세토우치 트리엔날레(Setouchi Triennale)로 귀결된다. 안도 타다오(安藤忠雄)의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오시마와 세토내해(瀬戸内)의 부속 섬인 테시마, 쇼토지마, 이누지마는 관광객들의 ‘Art Islands’ 투어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세토내해의 섬들은 아름다운 경관과 섬 특유의 지역적 특징을 살린 예술과 건축이 지역 재생의 수단이 되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 기업의 집념 어린 메세나 활동이 있다. 국내에서도 ‘구몬학습‘ ’아이챌린지‘로 익숙한 베네세(Benesse) 그룹은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교육 관련 기업이다. 설립자 후쿠타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郎) 회장은 예술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에 의해 현대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총칭하는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Benesse Art Site Naoshima)가 설립되었다.
나오시마는 해운업과 제련업이 쇠퇴함과 동시에 죽어가는 섬이 되었다. 1988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쿠다케 회장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게 “나오시마를 전 세계인이 찾는 예술의 섬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한다. 바다의 오염으로 버려져 가는 섬을 예술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후쿠타케 회장의 무모한 계획에 세계적인 건축가 역시 그의 집념과 진정성에 뜻을 같이 하게 된다. 후쿠다케 회장 주도 하 베네세 코퍼레이션이 미술관·호텔·캠프장의 복합 사업체인 ’나오시마 문화촌‘을 설립하였고, 2004년부터 세토우치 문화예술 활동의 총칭을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로 개칭했다. 이전부터 기업 컬렉션이었던 미술품도 많았지만, 안토 타다오가 건축한 베네세 하우스의 구조나 세토우치의 경관, 역사 등을 근거로 이곳 섬 이외에서는 볼 수 없는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설치 작품이 많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베네세 그룹에 의한 명확한 사회적 목적의식을 가진 예술재생 프로젝트는 전 세계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예술이 환경 문제와 기후위기에도 실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개최된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인 세토우치국제예술제(瀬戸内国際芸術祭)가 세계적인 화제가 되면서 세토내해의 섬들이 예술 섬으로 본격적으로 탈바꿈한다. 최근에는 오히려 각 섬들의 전통과 민속, 농어업, 공장, 산업 유산, 분재 등 섬들의 다양한 생활 그 자체를 예술적으로 복원하는 힘을 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베네세 그룹의 나오시마 예술 프로젝트에는 세대·지역·장르를 넘어 모인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소통한다. 교류와 소통이라는 인간적 감성이 오히려 지역 재생을 부수효과로 만든다. 이렇게 베네세 그룹에 의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한 기업 메세나 활동은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
개인의 문화예술 후원과 국제화, 한다 하루히사(半田晴久)
일본 문화예술 메세나의 주목할 한만 특징 중 하나는 사회 저명인의 개인 후원에 의한 활동의 다각화·국제화를 들 수 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한다 하루히사(半田晴久)이다. 그는 다양한 직업과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로 그 자신이 바리톤, 노(能) 연기자, 극작가로 활동하는 예술가이면서 종교인, 사업가로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문화예술 지원은 2012년부터 시작된 호주 시드니의 ’한다 오페라‘로 불리는 ’Handa Opera on Sydney Harbour‘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상주단체인 Opera Australia는 오페라 관객의 저변 확대를 위한 새로운 형식의 야외 오페라를 한다 하루히사의 지원으로 기획하였다. 첫 작품은 라 트라비아타였으며, 4만 명의 유료관객을 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다 오페라는 행사의 가장 큰 후원자인 한다 하루히사의 이름에서 명칭을 가져왔다. 부활절 전후인 3~4월에 개최되는 한다 오페라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하는 화려한 수변무대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시드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꼭 관람해야 하는 이벤트로 자리매김하며 지난 8년 동안 누적 4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Opera Australia 역시 한다 하루히사의 지원에 의해 티켓 판매 증가, 재정 건전성 향상, 관객 확대, 고용 창출 등 눈부신 성과를 달성하게 된다. 또한, 시드니의 차세대 대표 문화관광 상품으로 입지를 돈독히 하고 있다. 호주의 뉴사우스 웨일스 관광청 Destination NSW가 관람객 2,9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시드니 비 거주 응답자들의 69%는 한다 오페라를 보기 위해 시드니 또는 뉴사우스 웨일스(NSW) 지역에 방문한다고 하였으며, 13%에 해당하는 응답자들은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한다 하루히사 회장은 이렇게 일본을 넘어 문화예술 지원의 국제화를 선도하고 있다. 세계예술문화진흥협회(The Internationa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IFAC, 世界芸術文化振興協会)는 그가 1996년 설립한 특정비영리활동법인(NPO법인)이다. 독특한 것은 한다 회장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영향력으로 인해 일본을 넘어 미국, 영국, 호주 각국에 동명의 공익법인이 설립되어 협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전통 예술·국제문화교류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공연 행사, 전시회, 콩쿠르를 주최하고 있다. 순수 민간 중간지원 조직으로 장학금 지급, 예술가 육성, 전통예술, 학술, 문화 교류 지원, 국제협력 등 국가 문화정책 공적 영역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협회는 일본에 약 2,000명의 개인 및 법인 회원을 보유하고 있어 예술문화 지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협회의 임원 역시 유명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한다 회장의 풍부한 인맥을 짐작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SDGs) 구현을 위한 기업 메세나
일본의 기업 메세나는 지난 20여 년 이상 지속된 경기 악화로 인해 다소 쇠퇴하는 듯 보일 수 있으나, 그 근저에 있는 이념과 방향성은 변화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즉,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공헌 기업 정신을 적극 경영에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ESG 경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 공적 영역과 파트너로서 문화예술의 공공성, 사회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제 일본의 기업 메세나 활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최근 일본은 UN의 지속가능 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이행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 ESG에 주목하고 있다면 일본 사회는 현재 SDGs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기업 메세나가 바로 SDGs 그 자체라는 인식이 기업 내 확산되고 있다. ‘문화의 사회적 영향’ 강화를 위해 SDGs를 적극적으로 연계하는 전 세계 문화정책적 흐름에 일본의 기업 메세나 역시 실천적 대응을 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