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Wicked와 인간의 양면성 “선과 악"

by Impresario


‘Wicked’

‘사악함’이란 이 영단어가 ‘훌륭한’·‘멋진’이라는 영국 슬랭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는데, 내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2000년대 초에는 이미 젊은 세대의 일상 언어로 완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군가 멋진 장면을 보며 “That’s wicked!”이라고 외치던 그 역설적 표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말장난처럼 들렸지만,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위키드>를 보고 나니 그 단어에 담긴 본질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부산에서의 첫 관람 — 우연이 만든 인연

<위키드>는 웨스트엔드에서도 브로드웨이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리고 기묘한 인연처럼 조카와 함께 부산에서 처음 보게 되었다. 추석 연휴 동안 조카는 브로드웨이에서 <위키드>를 보려 했지만 티켓값과 일정 탓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표 두 장이 생겼고, 큰누나 가족의 선택의 여지 없는 일정은 결국 조카와 나를 공연장으로 향하게 했다.

부산 드림씨어터는 뮤지컬 전용극장의 장점을 극대화한 공간이었다. 특히 레그룸의 넉넉함은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의 오래된 극장들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쾌적함이었다. 다만 VIP석 18만 원이라는 가격은 보몰–보웬의 공연예술의 경제적 딜레마나 내한공연의 구조적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쉽게 가벼운 금액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20~30대 여성 관객층은 한국 공연시장의 현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뮤지컬을 오페라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나로서는 화려함이나 스펙터클보다는 인문학적 깊이를 선호한다. <레 미제라블>이나 <오페라의 유령>처럼 인간의 고뇌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 마음에 남는다. 그런 기대의 간극 때문인지, 나는 <위키드>의 내용을 거의 모르는 상태로 객석에 앉았고 기대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품의 예상 외 깊이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착한 의도가 악을 낳고, 악한 행동이 선을 향할 때

뮤지컬의 주인공 '엘파바'와 '글린다'는 선과 악이라는 고정된 선을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착한 의도가 악한 결과로 돌아오기도 하고, 악으로 보이는 행동이 더 큰 선을 위한 결단이 되기도 한다. 이 복잡한 구조는 인간의 삶이 흑백의 단순 도식이 아니라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최근 깊이 탐독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이 공연 내내 겹쳐 떠올랐다.

공연을 보며 떠오른 것은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의 본질이었다. 두 철학자는 서로 비슷한 듯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인간을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을 ‘맹목적 의지(Will)’라고 보았고, 니체는 이를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로 확장해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과 두려움, 충동과 양심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악으로 보이는 결단이 더 큰 선을 이루기도 한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괴물과 싸우다 보면 자신도 괴물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결국 엘파바와 글린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의지와 그림자의 은유이며, 그 복잡한 모순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결국 두 사람의 철학은 인간을 선악이라는 얇은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충돌하는 의지와 욕망의 깊이로 읽어내라는 조용한 요구였다. “최악 속에서도 최선을 보자”는 나의 신념 역시 엘파바의 서사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인간이 내면에서 쓰고 있는 두 얼굴

작품을 보며 가장 깊은 울림을 준 지점은 쿠스타프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대목이었다. 외향성과 내향성, 남성의 무의식 속 여성성인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 속 남성성인 ‘아니무스’—융이 말한 이러한 심리적 양면성은 인간을 하나의 틀로 설명할 수 없게 만드는 복합적 구조다.
<위키드>는 바로 이 다층적 자아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드러낸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착함’과 ‘사악함’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종류의 그림자와 빛을 품고 있으며, 바로 그 모순이야말로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보여준다.


‘Wicked’의 역설 — 사악함과 환희가 만나는 순간

뮤지컬 제목 ‘Wicked’ 자체가 동시에 상반된 감정이나 태도를 느끼는 상태인 양가성(ambivalence)을 품고 있다. 사악하다는 뜻이면서도 신세대 슬랭으로는 ‘최고’, ‘멋진’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엘파바가 외치는 “I feel wicked!”는 직역하면 “나는 사악하게 느껴져!”와 “기분이 대단해!”라는 양가적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즉 ‘wicked’라는 단어가 가진 사악함과 환희의 역설적 결합이 드러나는 대사다. 한국어 공연에서 이를 “여자로 느껴져”로 번역한 것은 원문의 언어적 다층성보다 엘파바가 자신의 힘과 정체성을 자각하는 순간을 강조하려는 연출적 선택으로 이해된다. 나 역시 이 장면을 그녀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긍정하는 전환점으로 보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번역은 ‘wicked’의 언어적 역설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그 감정의 방향성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해석에 가깝다.


예상 밖의 깊이—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이처럼 작품의 철학적 결은 예상보다 깊었지만, 그 깊이가 무대를 압도하거나 관객의 감각을 가리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넘버는 다른 대형 작품들에 비해 대중적 흡인력이 다소 약한 편이었다고 느겼다. 그러나 <Popular>와 <We Deserve Each Other>처럼 극적 구성과 잘 어우러진 곡들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무대기술이나 플라잉 연출은 다소 평범했지만,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위키드>는 화려한 장치에 가려져 있지만, 실은 놀라울 만큼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말한다.
인간은 어느 하나의 얼굴로 정의될 수 없으며, 선과 악은 나뉘는 선이 아니라 서로 스며드는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엘파바와 글린다는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이다.

우리는 매일 선과 악, 용기와 두려움, 욕망과 양심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순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그날 부산의 극장에서 나는 마녀들의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뮤지컬 #위키드 #철학 #심리학 #칼 융 #니체 #쇼펜하우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예술과 교류,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