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이어지면 많은 이들이 길을 나선다. 낯선 도시의 공기를 마시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느끼며,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여행은 언제나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왜 우리는 그렇게 떠나는가? 단지 쉼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여행하는 인간’, 곧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다. 길 위에서 배우고, 깨닫고, 다시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도구를 만드는 존재’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 정의해왔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사고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으며, 다른 문명과 문화를 만난다. 교류하고 배우며, 타인을 이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길 위의 존재’로서의 본성을 드러낸다. 낯섦과 마주할 때 우리는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느끼고, 타인의 문화를 통해 스스로의 경계를 확장한다.
예술은 바로 이 ‘길 위의 만남’ 속에서 태어났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의 조형미와 인도의 불교 미학이 융합된 대표적 사례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불교 미술은 헬레니즘의 입체감과 사실적 인체 표현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얼굴에 서양적 조형미가 깃들었다. 그 여정에는 상인과 승려, 여행자, 그리고 예술가가 있었다. 경계를 넘어선 인간의 발걸음이 바로 창조의 출발점이었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유럽 각지를 연주 여행하며 음악 세계를 넓혔고,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미학을 완성했다. “여행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는 괴테의 말처럼, 예술은 낯섦 속에서 성장한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보다 일찍이 동양과 서양을 여행으로 연결한 이슬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문화를 기록했다. 그의 여정은 당시 이슬람 문명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거대한 문화 네트워크였음을 보여준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 속 주인공 산티아고 역시 사막을 건너며 ‘자기 존재의 진실’에 다다른다. 여행은 곧 자기 발견의 여정이며, 예술은 그 여정을 언어와 이미지로 남긴 기록이다.
이 여정의 끝에서 인간은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바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인간’이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이징아는 “인간의 문화는 놀이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유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천이자 예술의 본능이다. 상상력과 감정이 결합될 때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놀이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그 자유가 창의력으로 이어진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에서 주인공은 떠남을 통해 다시 삶을 배운다. 먹고, 걷고, 보고, 노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예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무대 위의 춤사위, 거리의 음악, 벽화의 색채 속에는 인간의 놀이 본능이 살아 숨 쉰다. 예술은 곧 인간이 세상과 유희하며 소통하는 언어인 셈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많은 인간의 일을 대신하지만, 여행하고 교류하며 유희하는 인간의 감성만큼은 대체할 수 없다. AI는 작품을 ‘만들’ 수는 있어도, 여행지의 바람과 거리의 악사, 낯선 미소 속에서 느끼는 감동을 ‘경험’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의 노래에 울고, 미술관에서 처음 보는 작품 앞에서 마음을 빼앗긴다. 그 순간,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진다.
결국 예술은 여행과 교류를 통해 창의성을 확장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문화 다양성의 힘을 키운다. 인간은 그 과정을 통해 더 완전한 존재로 진화한다. 그러니 여행을 떠난다면 단지 풍경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예술과 문화를 함께 마주하자. 낯선 예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만나게 된다. 여행이 주는 창의성과 포용의 힘을 믿어보자. 그것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길이다.
예술은 교류 속에서 자란다. 교류가 멈추는 순간, 예술도 멈춘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