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나눔요양원 하모니카 공연
하모니카 강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어쩌다 한 번씩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나는 문득 하모니카 강사회 동기들과 내가 아는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실천한다면 그것도 보람되고 알찰 것만 같았다. 왜냐 하면 하모니카 동기들 중에는 전문적으로 하모니카 강의를 하는 전문가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 하모니카 강사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질량마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갓 자격증을 딴 풋내기인 나와 일선에서 활동하는 현직 강사의 무게를 어떻게 동일한 좌표에 표시할 수 있을까. 이미 좌표에 안전하게 정착한 동기들에 비해 나는 한낱 작은 망둥어에 불과했다.
다행히 내가 요양원 하모니카 공연 재능기부를 제안했을 때 강사회 동기들은 일제히 고개를 주억이며 의미심장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모니카 공연이 실행에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동기들 간의 응결된 의기투합은 공연준비를 잘 채근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공연은 천안의 중앙소방학교에 이웃한 행복나눔요양원에서 갖기로 하였다. 그 요양원은 직장에서 단체 봉사 나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사실 치매에 걸려 살아가시는 어르신이 안쓰러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얼마 안 되지만 자비를 털어 개인 기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양원 공연 준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도처에 할 일이 많아 부산 피워야만 했다. 동기들 간에 중복되지 않게 하모니카 연주계획을 수립해야 했고 리플릿도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현수막도 고안하고 음향장비도 사전 점검해야 했다.
현수막은 '음악이 빛이 되는 세상, 사단법인 대한하모니카협회 제11기 강사회 콘서트'로 정했다. 사실 처음 고민했던 내용은 '하모니카 소리는 비에 젖지 않는다'였다. 하지만 정작 음악이 빛이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고쳤다.
드디어 2018년 1월 27일, 콘서트 공연하는 날이다. 하늘은 가뭇없이 높았다. 대지에는 간헐적인 미미한 바람이 공평하게 태동하고 있었다. 일찍 도착한 동기들과 현수막을 걸고 음향장비를 점검하는 일은 신명이 났다.
점심 무렵 동기들과 마지막 무대를 점검했다. 요양원에서는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하지만 행여 음식이 모자라는 불편을 끼칠까 봐 먹고 왔다고 에둘러 말하고 동기들은 바깥에 나가서 식사를 했다.
행복나눔요양원은 육십 세에서 백세까지 치매를 앓고 있는 90여 명의 어르신들이 입원해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이 기저귀 캐어를 한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도 병원에서 세 달 동안 기저귀 캐어를 하고 돌아가셨기에 어르신들 볼 때마다 마치 내 아버지 같고 내 어머니 같았다. 아니 어쩌면 미래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행사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공연의 오프닝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현직 강사가 배경음악 없이 생목소리로 '창부타령'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더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흥을 돋궜다. 오프닝 노래가 끝나고 개회식 멘트를 여는데 오랜 그의 강사 경험이 밀도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까지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오프닝은 내 순서였다. 나는 이미애 시인의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낭송했다. 시낭송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숙했다. 이 적요한 분위기를 깨트려 준 것은 안양 현직 강사의 '안동역에서' 연주였다. 신명 나는 배경음악에 맞춰 하모니카의 맑은 소리가 무대에 음표처럼 뛰어다녔다.
그런데 서로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동기들이 별안간 어르신들한테 달려가 손을 마주 잡아 드리기도 했고 어르신 앞에서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서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르신들은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어느새 어르신 앞으로 다가가 '어르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어르신, 손이 참 이뻐요.' 하면서 한 분 한 분 손을 꼬옥 잡아 드렸다. 어르신과 내 마음이 영합하고 있었을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콧날이 애애하게 아파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떤 어르신은 '고마워요' 하고 말하기도 했고 구십이 넘으신 어르신은 말하는 것도 버거웠는지 내 손에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나는 다시 한번 어르신의 손을 꼬옥 잡아 드렸다.
하모니카 연주는 고무되는 분위기 속에 이어져 나갔다. 한분 한분 온갖 풍상을 겪은 어르신들의 눈매를 바라보는 순간, 내 생애에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본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요양원 봉사를 나갔을 때 나는 수동적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동기들이 다 같이 무대에 나가 합주곡을 연주했다. '고향의 봄, 오빠생각, 설날'이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연 시간은 흘러갔다. 1시간 10분 대장정의 하모니카 콘서트가 막을 내린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 요양원에서는 정말 감사하다며 다음에 또다시 공연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는 모습은 앗사리 짙은 호소에 가까웠다. 우리는 다음에 공연을 오겠다며 약속을 했다.
그 후 2020년 봄, 우리 하모니카 강사회 동기회는 다시 한번 공연봉사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남도 끝에 있는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모니카 위문 공연이었다. 병원에 하모니카 공연을 승인받고 공연계획도 수립했다. 현수막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가 터지면서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그 무렵 나는 한세인 어르신을 대상으로 소록도한센인하모니카동우회를 만들었었다. 수업도 주 2회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동우회에 가입한 어르신만 해도 열명이 넘어갔다. 어르신들은 하모니카 배우고 싶은 열성에 비싼 하모니카까지 집접 구입했다. 그러나 첫 수업하는 날, 결국 이 역시도 코로나로 인하여 취소되고 말았다.
사실 내가 한센인하모니동우회를 만든 이유는 또 있었다. 한센인 어르신들에게 하모니카를 알려드려 적어도 한 달에 한번 관광객들이 모이는 녹동항의 '인공의 섬'에서 한센인 어르신들의 멋진 하모니카 공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여, 한센인 어르신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드리고 싶었고, 관광객들한테도 한평생 고통 속에서 신음한 한센인의 애한(哀恨)을 알리고도 싶었다.
내가 살면서 정작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학창 시절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것과 이공계를 나와서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생겼다. 바로 하모니카를 배운 것이다. 하모니카는 내 봉사 활동의 영역을 넓힐 것이고 그만큼 스스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