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읽다
숙박은 모슬포항에 잡기로 했다. 올해 초 제주 여행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왔던 곳이 바로 모슬포항이었다. 그 항에서는 대마도와 마라도와 가파도를 바로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제법 큰 항의 규모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주변에 관광지가 많이 있어서 기반시설이 잘 갖춰졌다는 것도 마음을 움직였다.
제주 여객선 터미널에서 1시간 10여분 남짓 걸려 모슬포항에 도착했다. 숙소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슬포항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앙증맞은 커피숍이 앞에 커다 모텔 간판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대리석 계단 입구는 정갈했다. 안내소에는 숙박료가 40,000원이 적혀 있었다. 혼자 숙박할 건데 얼마냐고 묻자 주인은 숙박료가 35,000원이라고 했다. 일순 혼자여서 5,000원을 깎아 주었을까. 아니면 평일이어서 깎아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절감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실에 들어갔을 때는 환기를 제대로 시키지 않아 눅눅한 곰팡이 내가 났다. 나는 마치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꼬리 잘린 여우처럼 그 가격에 얼마나 좋은 방을 기대하겠냐며 술 마시고 게슴츠레 골아떨어지면 그만이라고 자위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모슬포항 관광을 나가기로 했다.
가파도와 마라도를 운항하는 정기여객선 운진항을 들렸다. 가파도는 '킹더랜드'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을 재미있게 봤지만 여행할 곳으로는 내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했다. 마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서 한번 은 꼭 가보고 싶은 섬 중의 하나다.
마라도는 가파도보다 배편이 자주 있었다. 하지만 수은주가 30도를 훨씬 넘긴 이 불볕더위에 마라도 여행을 간다면 돼지 퉁구이가 되거나 아프리카 흑인 아잡토가 될 것 같았다. 제주에 있으면서 흐린 날을 골라 여행하기로 했다.
모슬포 중앙시장을 들렀다. 이곳은 TV '바퀴 달린 집'에서 공효진이 방문한 곳으로 유명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작은 시골 시장이다. 주로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시장 같았다. 이상하게 바닷가에 위치하면서 회를 파는 곳은 없었다. 수산물은 두 군데 팔고 있었는데 두 곳 모두 회는 없었고 소라나 전복 같은 해산물이었다. 게다가 손질을 해주지 않았다.
송악산주차장에 내렸을 때 아스라이 산방산이 보였다. 멋진 풍광이다. 송악산은 소나무가 울울창창해서 송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입구에는 이를 대변하는 듯 해송들이 깊은 그늘을 늘이고 있었다. 그 그늘은 땀을 식히고 더위를 식혀 등반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충시켰다. 하지만 소나무 숲을 휘돌아 가면 그늘이 없는 천길 갯바위인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송악산은 두 개의 분화구로 이루어진 이중화산체의 특이한 구조라고 한다. 주위에 기생화산이 발달하여 99봉을 이루었는데 이른 아침의 물안개와 저녁노을이 기묘한 천태만상의 장관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산토끼가 앞질러 갔을 법한 산길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우측에는 편히 묵상하며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운동시설도 갖춰져 있다. 가장 좋은 곳은 이 무더위에 나무들이 깊은 그늘을 늘이고 있다는 것이다.
산길을 벗어나자 은빛 물결 부서지는 바다 너머 섬이 보였다. 가파도였다. 만약 이 섬에 해일이 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쓰나미가 오면 형체도 없이 휩쓸려 나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해송숲을 지나자 그늘은 끝이 났다. 염천의 날씨에 속수무책이었다. 작은 모자로 큰 바위 내 얼굴을 가리기에는 챙이 너무 작았다. 그나마 위로는 푸른 바다가 만들어 낸 수려한 정경이었다. 이제 나는 앗사리 내리쬐는 햇살과 뜨겁게 악수하기로 했다.
저 데크가 놓여 있는 길에도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멋진 기암바위의 절경이 조금 위로를 해 줄 뿐이다. 나는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런데 더이상 트레킹 할 수 없었다. 앞에는 공사 중이라며 들어가지 말라는 출입 방지테이프가 꽁꽁 동여매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30여분 걸어왔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저 막아놓은 저 방지줄이 얄궂을 뿐이다. 종종걸음을 쳐 되돌아 와야만 했다.
다행히 다른 숲길을 발견했다. 해송 그늘이 나오면서 산책하기 좋은 샛길이 펼쳐졌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서 쿠션감도 좋았다. 혼자 걷기에 좋은 호젓한 산길이었다.
샛길을 빠져나오자 산방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펼쳐졌다. 벌써 12년 전이다. 산방산에 있는 산방굴사를 여행했던 적이. 산방굴사는 또 얼마나 많이 변해 있을까.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가를 배회했다. 첫 번째가 시야에 들어 식당이 '별잔달잔' 소주방이었다. 아직 대낮인데 홍조를 물들인 조명이 내게 오라며 손짓하고 있다. 소주에 별을 타고 달을 타서 마시면 어떤 맛이 날까.
빼꼼히 문을 열어 보았다. 테이블은 고작 2개, 내가 좋아하는 허름한 선술집이다. 하지만 두 테이블 손님이 다 차 있었다. 손님이 다 찾다는 것은 현지 맛집이라는 것을 근거할 테다. 안타깝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두 번째 들어온 것이 물꾸럭 식당이었다. 무슨 뜻인가 검색을 해보았다. 문어의 제주도 방언이란다.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라는데 오늘은 회가 당긴다. 조림이니까 패스하기로 했다.
세 번째 수족관의 무늬오징어가 보였다. 유영하고 있었다. 요즘 동해 주문진에서는 오징어가 금징어라고 한다. 어부들은 출조해도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울상이고, 관광객은 오징어가 비싸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고 한다. 무늬오징어는 바로 죽어 회로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 이번이 기회다.
4만 원짜리 무늬오징어를 주문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의 하얀 미소가 좋다. 자리를 앉자 에어컨 바람이 추울 거라며 안쪽의 깊은 자리를 권했다. 종업원은 한국말이 서투른 동남아 계통의 외국이었지만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고 그만큼 친절했다.
드디어 4만 원짜리 무늬오징어 회가 나왔다. 감탄사가 나왔다. 회도 이렇게 맑고 투명할 수 있구나. 썰어온 회 밑으로 훤하게 대나무가 보였다. 순간 우리네 삶도 저렇게 맑고 투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추에 오징어 두 점을 넣고 밥을 조금 넣은 후 마늘과 양념장으로 간을 하여 소주 반 잔을 입에 털어놓으니 그 식감이 일품이다.
어느새 비워지는 술병,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이 다 비워질 무렵 이웃해 보이는 물꾸럭 식당으로 서서히 박명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제주도라는 이방의 땅에서 술기운에 고취되어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었다.
아쉬웠을까. 편의점이 앞에 보였다. 참새와 방앗간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카프리 한 병 마시면서 게슴츠레 취해 갔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이울었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밤이라는 감정. 밤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낯선 지역에서의 밤은 생경감 속에 설렘을 동반한다.
숙소에 오자마자 옷가지는 화장대 홀라당 벗어 놓은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잠에 빠졌다. 모기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기승을 부렸다. 칼칼한 새벽 3시였다.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디언북 '불편한 편의점' 소설을 아침이 잇대 올 때까지 들으며 날밤을 꼬박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