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라 좋겠다 #1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때려치울 거라고.
어느 날 나는 너무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라고.
모두가 놀랐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홧김에, 그냥 회사 출근하기가 싫어서, 회사에 권태를 느껴서 등등 이런 단순한 이유로 '퇴사'라는 말을 입밖에 꺼냈을 사람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분명 생각이 있겠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에 확신이 있으니 도전해보려는 거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글쎄, 아직 현실이 와 닿지 않았던 건가. 난 남편의 퇴사에 대해 심각성을 잘 몰랐다.
남편의 퇴사와 새로운 시작을 응원할 수 있었던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기에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당시 남편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만약 더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나섰다면 글쎄 내가 과연 그때도 흔쾌히 오케이 해줄 수 있을까. 서른넷은 3~4년 정도는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고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기에 충분히 젊고도 남는 나이라 여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모하게 그 길에만 매달려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 듯하다.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둘이 함께 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는 믿음으로 결혼까지 결정했으니! 그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온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행여나 그게 잘 안 되더라도 우린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갑자기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로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흥분한 나는 덜컥 오케이 했다.
둘째, 나도 멀쩡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남편의 수입은 제로, 온전히 나의 월급만으로 생활해야 한다면? 당시 나의 연봉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나보다 두배보다도 더 많이 벌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 연봉을 뒤로하고 회사를 그만둔다? 당장 우리의 돈이 1/3 가량만 남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 혼자만의 월급으로는 좀 빠듯할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외벌이 부부인 사람들도 있고, 거기다 아이까지 잘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 남편이 백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하는 건데 왜 남편이 아무것도 안 해서 나 혼자 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생각이 가도 너무 갔다.
분명 생활의 변화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기 나름이겠지 뭐.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당장 먹여 살려야 하는 '아이'가 아직 없었다. 그냥 서로가 조금 아껴 살면 되겠거니 했다. 물론 워낙 둘 다 여행을 좋아해 틈만 나면 나가 놀았는데 그 기회가 훅 줄어들겠고, 종종 즐기던 근사한 외식도 자제해야겠다는 정도의 마음의 준비는 조금씩 하고 있었다. 아쉬울 뿐 이걸 못 한다고 당장 굶어 죽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셋째, 남편이 회사 일로 너무 바빴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았다.
남편은 신혼여행지에도 노트북을 가지고 가야만 했다. 공항 라운지에서도, 심지어 호텔 로비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옆에서 보는 나보다도 일하는 사람이 더 괴롭겠지 싶어 딱히 별 말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신혼여행뿐만 아니라 그 후 모든 여행에서도 남편은 늘 노트북을 챙겨나갔고 나는 공항 라운지에서, 카페에서, 호텔에서 계속 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봐야 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퇴근이 퇴근이 아니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취업하기 전 연애할 때 남편이 데이트하다가 노트북으로 간간히 일하는 모습이 좀 멋있어 보였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입사를 했는데 우리 회사는 데스크톱이었다. 잔뜩 실망한 나에게 남편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게 좋은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회사에서 노트북을 주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하라는 의미였다.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쿨하게 알겠다고는 했건만,
사실 우리의 삶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나는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 한 사람이라도 월급 꼬박꼬박 잘 받아야지. 아무리 남편 사업이 잘 된다 하더라도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알고.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회사에서 생기는 사소한 일에 툴툴거리지 않게 됐다. 어차피 내가 평생 다녀야 하는 직장 뭐 어쩌겠어하는 마음. 별 잡생각 없이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남편은 당연히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바빠졌고 새로운 스트레스가 생겼다고 한다. 나는 남편이 사업을 하면 자기 시간을 유동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주 아주 큰 착각이었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퇴근 시간의 개념이 없어졌고 노트북을 켜놓고 있지 않더라도 계속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하더라. 남편이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재밌는 거 좀 보면서 쉬나 하고 보면 일과 관련된 기사나 정보들을 읽고 있다.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것이 남편에게는 새로운 스트레스겠지만, 그래도 압박감이나 강제성 없이 내가 하고 싶고 관심 있는 일을 계속하는 거니 이 스트레스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퇴사 일년 후 우리에게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기에 더더욱 책임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보며 가끔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가장이라는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남편이 아쉬워하는 것 중 하나는 또래 중에 사업하는 친구들이 없어 같이 공감하며 이야기를 공유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30대 중반은 새로운 일을 도전하기에 어린 나이인 것이다. 30대는 누구든 구체적으로 그려내 볼 수 있고 마음만 굳건히 먹는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아내들이
무조건 남편의 퇴사를 응원할 수 없다.
아내가 바라봤을 때 남편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미래를 상상해보면 무작정 막막한 것이 아니라 조금 기대해봐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야 응원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이 글쓴이는 남편을 응원해주는데 내 아내는 그래 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고민이라면 그전에 내가 얼마나 아내에게 확신을 주었는지, 또 내 일에 대해 나는 얼마나 확신이 있는지를 좀 더 생각해보면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30대의 퇴사는 단순 도피성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무모하지 않은, 책임감이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벼보고 싶은 새로운 도전이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 사람으로부터 응원과 지지를 받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힘차게 새로운 출발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인 나 또한 언젠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겠지. 그날이 오면, 남편이 날 전적으로 믿고 응원해줄 수 있도록 그동안 내공을 많이 쌓아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