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흔적을 "개처럼" 잘 남기는 방법
저녁 8시 30분 그렇게 힘들게 운동을 끝내고도 , 습관처럼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마치고 맥주 캔을 따고 베란다에 앉아 멍하니 밖을 쳐다보고있다보니 벌써 11시가 되어간다.
한 숨을 푹 쉬면서 나도 모르게 나온 한 마디
" 하.. 그만 먹고 자야 하는데.... 이런 게 번아웃인가? "
쉬는 것 외엔 도통 아무것도 하기도 생각하기도 싫다. 그렇다. 요새 뭔가 내가 주도적으로 에너지를 쓰고 하는 일들에는 전혀 손이 가질 않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빌어먹기 위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것들에 하나씩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왜? 돈을 벌어야지?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나의 인생에 어떤 지점을 가고 있는 거지?
사춘기가 다시 오려나 보다. 아니야 그래도 이 몸뚱이를 이끌고 35년 살아왔는데 전형 성장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등학생 때의 감정과 행동으로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다. 뭔가 이 상황을 타게 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라도 해야 된다는 절심함에 군시절부터 20대 중반까지 열심히 썼던 노트들을 꺼내보았다. (뭔가 20대 열정 넘쳤던 어린 나에게 기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야밤에 뭔 지랄인가 싶었지만 뭔가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노트를 잡스럽게 넘기다 툭 걸린 기묘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 개처럼 살자 "
이게 뭔 개소리지? 내가 뭘 적고 싶었던 거였지?
암호화된 문장처럼 도통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아주 뜻밖의 순간에 기묘한 문장을 온몸으로 해독할 수 있었다.
목요일 오후 7시
관장님의 제안으로 오늘 새롭게 온 20대 회원과 스파링을 갖게 되었다.
나 : " 매스 말고 진짜로요? "
관장 : " 쟤가 진짜로 하고 싶데 , 다른 데서 좀 배웠데 해봐."
아마도 관장님은 새로 온 회원의 실력을 보고 싶었던 참이었을 것이다. 뭐 상관 없다 어차피 가볍게 하면 되겠지란 생각은 시작하고 5초 만에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멧돼지 새끼처럼 미친 듯이 나를 코너에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하도 도망 다녀서 2R에 들어가기 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가뜩이나 안 남은 체력을 전부 소진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호흡을 겨우 돌리나 싶었는데 2R에도 개돌이다. 중반에 좀 힘이빠지건 같아 카운터를 걸자, 조금은 잦아지는 듯하더니 3R 시작하자마자 똑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끝나고 완전히 지쳐 쓰러진 나에게 관장님이 소리쳤다.
관장 : " 야! 이 새끼야! 도망만 다니면서 뭘 하겠다는 거야!."
나 : 속으론 " 뭐라는 거야 X발 "이라 했지만 , 입으로는 "헉 헉 " 숨만 가쁘게 쉴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 같으면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갈 법도 한데 그럴 기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차가운 샤워로 이 뜨거운 열기와 심장박동을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 몸을 진정시키고 거실로 나와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켰다. 마치 나의 내장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냉수의 한기가 이상 야릇 쾌감과 섞여서 숨과 같이 뱉어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혼 잣말이 나왔다 .
" 살 거 같다. 그래 오늘 난 개처럼 살았구나 "
온몸을 녹일 거 같던 열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자 내가 살아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개처럼 살자." 간단명료하지만 통렬한 문장이었다. (박웅현 아저씨의 책에서 발췌했던거 같다.)
( 개는 어제의 슬픔을 지닌 채로 또 내일의 밥 걱정을 하면서 오늘 바로 지금 공놀이를 망치지 않는다. 현재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집중하며 살자 정도의 이야기였다.)
삶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 때는 꼭 무언가 대단한 것과 특별한 것을 통해서 이 슬럼프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뭔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고민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렇다 . 특별함으론 잘 안되더라 .
그래서 생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상말이다.
당연하듯 숨을 쉬지 말자.
당연하듯 밥을 먹지 말자.
당연하듯 잠을 자지 말자. 등등등
그저 당연히 여겼던 일들에 조금은 다른 흔적들을 남기려 한다.
※ 인스타/트위터 같은거 , 2010년 페북 이후로 해본적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위로받았던 20대의 노트처럼, [살아왔다/살아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브런치의 좋은 글들을 보며 제가 위로 받았듯 , 저의 아둥바둥대는 삶의 흔적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래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