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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서유럽여행기

2023년 7월 서유럽서 느낀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의 수집기(열번째)

by 아나포트킨

어제의 여독은 푹 자고난 후 아침이 되니 말끔하게 사라졌다.

지금 아침 일곱시가 조금 넘었는데 우리 가족 들은 아직 한밤중이다. 피곤했겠지. 사실 장시간 자동차 여행에서 운전자인 나보다 동승자였던 우리 가족 들이 더 피곤할 것이라는 건 내 생각인가?

사실, 어제, 어둑한 저녁에 경험한 파리의 모습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창을 열어 밖을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데 기온은 17도다. 지금 서울은 불볕더위라는데 여기 파리 날씨는 서늘하다.

파리첫날.아침 짚앞서 바라본 풍경.jpg 파리, 우리 집 창문에서 바라본 거리 풍경
파리에서 첫날, 커피와 누텔라.jpg 파리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 커피 그리고 누텔라

이 곳 건물도 로마의 그 숙소처럼 엘리베이터가 없다. 파리의 우리 집은 2층에 위치했는데 1층부터 2층까지 계단참이 3개나 된다. 어제 저녁 각자의 캐리어를 낑낑대며 힘들게 올라왔던 기억이 있지만 좁디좁은 엘리베이터 보단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블랙커피의 쓴 맛과 어제 휴게소에서 가져온 누텔라 과자에서 스며 나오는 극강의 단 맛은 꽤 잘 어울렸다. 오늘 하루, 파리에서의 여정이 잔뜩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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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오르세 미술관 상부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여긴 예전 기차역이었다고 한다. 멋들어진 개조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작품들 덕분에 말 그대로 예술의 전당이 되어 세계시민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다. 아치 구조물 특성상 내부에 기둥이 필요 없어 시원한 개방감을 주는데 한 켠에 매달려있는 큰 시계는 이곳이 역사로서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오르세미술관1.jpg 오르세 미술관 내부
오르세미술관2.jpg 또 다른 곳에서의 오르세 미술관 내부

오전엔 궂은 날씨 덕에 비를 맞고 돌아다녔고 - 여기 파리 사람들은 비가 오는데도 대부분 우산을 안쓰더라는 - 오후부터 오르세 미술관에 입장하여 많은 작품을 지나쳤다. 각 그림, 조각마다 농축된 에너지가 있다고 난 확신한다. 명작이라고 하는 것들은.. 관람객 각각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그 명작들은 에너지를 축적하고 동시에 농축된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하며 다시 끌어 모으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분명히 명작들은 유기체다.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내 안의 에너지가 마치 삼투압 현상처럼 스르르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들로 흘러들어간 것 같다. 몸이 나른해지며 확 피곤해짐이 미술관 밖으로 나갈 때 느껴진다.


미술관 내에서 내 감정을 헤집으며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게 만든 작품들을 고르라면.. 난 아래의 그림들이 인상 깊었다. 초월적이면서도 인간 내면의 어두운 것들, 이를테면 가학성과 잔혹성 등을 폭로하는 그림들이라고 할까. 앙리 루소는 생계를 위하여 통행료 징수원 직업을 유지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그렸다고 한다.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광기어린 소녀의 무자비한 살육이 연상되는데 “전쟁은 눈이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Le sphinx.jpg Le Sphinx Et La Chimere(Louis Welden Hawkins)
War of the ride of discird.jpg War or the Ride of Discord(Henri Rousseau)

다른 작품들은 초상화다. 좋아하는 소설인 “달과 6펜스” 표지 그림인 고갱의 초상화와 쇠라의 것이다. 고갱의 예술적인 성취와 그 것들의 깊이는 잘 모르겠으나 타히티에서의 강렬한 그의 작품들 그리고 서머싯 모옴에 의하여 소설 속에서 성인과도 같은 경지로 추앙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이 그림 앞에서 맴돈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시기하고 동경하고 경멸하기도 했던 그 찰스 스트릭랜드의 원형이라는 말이지..

푸른색의 옷을 입은 다부진 인상의 농촌 소년의 흐릿한 모습에서 몽환적이면서도 미래에 대하여 - 어떠한 일들이 닥칠지라도 - 삶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농사꾼의 모습이 나에게는 보였다. 그런 느낌으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이다.

Paul Gaugin.jpg Self 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Paul Gaugin)
George Seurat.jpg Le Petit Paysan en Bleu(George Seurat)

몇 시간 동안 미술관 안에 있다 보니 신선한 공기가 절실했다. 미술관 바로 옆엔 멋들어진 까페들이 줄지어 손님들을 기다린다. 파리에서는 에스프레소가 어울릴 것 같았다. 무작정 한 곳을 선택하고는 노천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파리의 향취를 음미했다. 정말이지 나는 파리의 이 냄새를 내 기억에 아로새기기 위해 코를 킁킁대며 진지하게 몰두했었다. 어떤 곳은 냄새로도 추억에서 꺼내어 회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잠시나마 파리지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파리가 주는 이 분위기와 냄새를 최대한 느끼려고 난 몸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좋았다. 담배도 뿜었으면 마지막 남았던 감각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있는 처지라.. 아쉬웠다.

오르세미술관앞까페1.jpg 오르세 미술관 뒤편 건물들과 까페
오르세미술관앞까페2.jpg 오르세 미술관 근처 까페

파리 사람들은 싸이클 경주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마침 내가 파리에 있던 그 날 일요일 오후는 “Le Tour de Franc"의 마지막 날이었다. 싸이클 선수들의 질주 행렬이 파리 시내를 관통하며 마침내는 샹젤리제에서 그 피날레를 장식한다고 한다. 7월1일부터 7월23일까지 프랑스와 그 주변국들을 무대로 3,500km의 거리를 매일 주파하는 피를 말리는 지옥의 질주지만 사람들은 그에 열광한다고 한다. 가뜩이나 북적한 일요일 오후인데 이쪽 노틀담 대성당 근처 거리는 싸이클 행렬을 기다리는 인파로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경찰의 통제와 왁자지껄한 군중들의 함성들.. 그야말로 거리는 인산인해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사람 구경이 제일 재미있을 때가 종종 있다.

파리에서 사이클선수들을 기다리는 군중.jpg 파리 6e Arr.에서 사이클 선수들의 등장을 기다리는 군중들
파리에서 사이클선수들을 기다리는 군중2.jpg 파리 6e Arr.에서 사이클 선수들의 등장을 기다리는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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