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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릅 Mar 21. 2022

그림 그리기 싫을 때 가는 곳


나는 매일 그림을 애증 한다. 어쩔 땐 작업이 너무 잘돼서 네가 없으면 어쩔뻔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하다가 어쩔 땐 이유 없이 화가 나고 그림의 존재를 잊고 싶을 만큼 미워지기도 한다. 혐오스러울 정도의 기분까지 느끼는 날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마음도 같이 올라온다.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데?

이런 마음은 매 순간 오더라. 실제로 단 한 장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해도 있었고, 아예 미술과는 다른 일에 빠져서 살기도 했다. 그림 말고 재밌는 건 정말 많다. 근데 웃긴 건 난 항상 그림에게 다시 돌아갔다. 마치 보살 애인과 내 맘대로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하는 느낌이랄까. 바람피운 사람들을 그렇게 욕해왔는데 나는 양다리를 제대로 걸쳐왔다. 내 애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니깐.



이상한 애들 중


그래서 나는 산을 좋아한다. 산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움직인다. 내가 원할 때 가면 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마치 그림처럼 항상 내가 돌아갈 수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싫어지는 날에는 산에 간다. 날 기다린 건 아닌지 미안하다며, 자주 오겠다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

기다렸어


나는 무엇을 하든 그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너만 한 애가 없더라, 그게 결국 그림이더라.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 거다. 그래서 그림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나의 그림, 나의 작업실




​안타깝게도 난 너무 간사해서 여전히 그림을 미워한다. 답을 알면서도 괜히 투정을 부리는 건지, 몸속 호르몬에 지배되는 날엔 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불안한 마음을 느끼지만 날 기다리는 그림을 떠올리면 도저히 내팽겨 칠 수 가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도 작업실에 간다.


​​


작업실에 도착하면 이상하게 맘이 편해진다. 긴장이 풀리는 건지 그저 멍을 때리거나 일기를 쓴다. 아님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온다. 컨디션이 좋으면 이전에 그린 그림들을 살펴본다. 손가락 하나 까딱대기 싫어서 턱을 괴고 그림을 쳐다본다. 쳐다보다가 운이 좋으면 그림을 그리게 되기도 하니깐. 그걸 노리기도 한다.



최근 산에게 못 갔다. 생각해보니 나는 보살 애인을 두 명이나 두고 있었네.. 조만간 날 기다리고 있을 산에게도 가야겠다. 산을 그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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