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 드로잉 배우며 두 달 살기
비엔나 살이를 준비하며 신청했던 또 다른 미술 수업을 가야 했다. 긴장감에 몹시 떨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쫄지 마. 힘내."
남편이 주먹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며 응원의 몸짓을 보냈다. 의지와 다르게 내 속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수업 안내서에 나와있는 스케치북을 사러 화방에 갔다. 다양한 스케치북이 쌓여있는 진열대에 그 스케치북은 없었다. 직원은 다른 화방에 전화하며 알아봐 주었지만 역시 없었다. 혹시 팔지도 모르니 찾아가 보라며 미술 용품도 파는 서점을 안내해 주었다. 직원의 친절함이 고마웠다.
목탄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지만 수업 재료였다. 유럽에서는 목탄을 많이 사용하는지 매장에는 다양한 브랜드와 여러 형태의 목탄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오스트리아산 연필과 목탄으로 구성된 세트를 사고 연필 깎을 칼도 샀다.
나들이 삼아 비엔나 외곽에 있는 대형 화방 Boesner도 가보았다. 그라츠에서 발견했던 화방인데 체인점이라 비엔나에도 있다. 그 넓은 매장에도 사려는 스케치북이 없어 다른 회사 제품을 샀다. 다양한 미술 재료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삼매경에 빠졌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이날 미술 수업은 Zeichenfabrik라는 사설 학원에서 받았다. 학원 위치는 신경 안 쓰고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신청한 거였는데 비엔나에 도착해 지도를 검색해 보니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긴장감으로 몸이 굳기는 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다른 수업보다는 부담감이 덜했다.
커다란 건물 전체가 미술 학원인 듯했다. 수업하는 교실을 찾았다. 비엔나 여행 중인데 드로잉 수업을 체험하고 싶어 왔다고 하니 강사는 놀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업 첫날이라 수강생들은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독일어를 모르니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더듬거리며 영어로 소개했다.
"비엔나 경영 대학원을 졸업하는 아들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온 김에 비엔나에서 두 달간 지내려고 합니다. 저는 은퇴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비엔나 드로잉 교실을 체험해보고 싶어 참여했습니다."
수강생들의 따뜻한 미소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자신을 영어로 소개했다. 나를 배려해 줘서 고마웠지만, 대부분 젊은 그들의 영어는 무척 유창해서 별로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모델이 들어왔다. 인체 드로잉 수업이었는데 모델은 못을 벗고 강사의 지시대로 포즈를 취했다. 벗은 모델을 보고 그리는 수업은 화가 친구의 화실에서 경험해 봐서 낯설지는 않았다.
이곳 모델은 옷을 벗는 것에 우리나라 모델보다 스스럼없고 쉬는 시간에도 수강생과 별 격의 없이 대화하고 행동했다. 그런 분위기는 비엔나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했다.
선생님은 모델을 보고 그릴 때 신경 써야 할 포인트를 전체적으로 알려주고 수강생 개개인에 맞게 지도했다. 내가 그린 그림에서 잘 표현된 곳은 칭찬하고 어색한 부분을 바로 잡아주었다. 강사는 친절하고 열정이 넘쳤다.
목탄을 처음 써보았는데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쓱쓱 빠르게 그릴 수 있고 손으로 문지르면 곡면이 아름답고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막상 수업을 하고 보니 안내지에 있던 스케치북은 예시일 뿐 드로잉 종이면 상관없었다. 종이 크기도 자신이 원하는 사이즈로 사람마다 자유로웠다. 수업시간 세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독일어를 몰라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즐겁고 재미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까지 5분 거리인데 뭘 마중까지 나았냐고 하니 어둡고 낯선 거리라서 또 혼자 오면 심심할까 봐 나왔다고 한다. 남편과 손을 꼭 잡고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비엔나에서 드로잉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내게 주어진 행운에 고마움과 행복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