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 드로잉 배우며 두 달 살기
비엔나 생활이 그럭저럭 적응되기 시작하기 시작하자 남편은 비엔나와 가까운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여행하자고 했다. 당일치기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야 언제나 찬성이다.
비엔나 역에서 아침 8시 40분 기차를 탔다. 브라티슬라바까지 딱 한 시간 걸렸다. 기차역에서 구시가지까지 걸어서 거의 한 시간 거리인데 우리는 걷기로 했다. 여유롭게 걸으며 도시를 구경하고 강을 건너며 브라티슬라바 성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성은 멋졌다.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하늘이 파랗고 햇빛도 따뜻해 도시가 더 예뻐 보였다. 성당을 돌아보고 성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세워진 브라티슬라바 성에 오르니 바람이 심해 체감 온도가 내려가며 무척 추웠다. 단체 관광객도 많았는데 추위에 대비를 제대로 안 하고 온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고 눈물 콧물까지 흘렸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단순하지만 견고해 보였고 흰색 벽과 빨간 지붕이 강한 대비를 이뤘다. 가늘고 긴 세 사람 조형물은 특이해서 인상적이었다. 계단식으로 된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지만 겨울이라 볼 것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중세 풍 건물과 돌바닥이 남아있는 거리를 구경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하늘색 뾰족 지붕이 있는 중세에 만들어진 성문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각 나라의 주요 도시까지 거리가 표시된 둥근 원이 있었다. 8138km 떨어져 있다고 표시된 'SEOUL'이라는 글씨를 보니 서울의 위상을 확인받은 것 같고 괜히 가슴이 찡했다.
다시 걸었다. 거리 곳곳 독특한 조형물이 많았다. 특히 하수도에서 나오는 사람 조형물은 진짜 길바닥에 있어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이 조형물을 보고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우리도 줄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마켓도 나타났다. 커다란 나무에 전구와 장식이 매달려 있고 신나는 음악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유럽에서는 11월이면 어디서나 크리스마스마켓이 열리는 듯했다.
크리스마스마켓 상점 대부분은 먹을 것을 파는 가게였고 물건이나 기념품을 파는 곳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먹을 것보다 물건을 파는 가게가 더 많은 비엔나 크리스마스마켓과 비교되었다. 차분한 비엔나 크리스마스 마켓에 비해 확실히 더 활기차고 들뜬 분위기였다.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고르려고 크리스마스마켓을 몇 바퀴 돌았다. 가장 무난한 랑고스와 크리스마스마켓의 상징인 따뜻한 와인을 샀다. 테이블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와인이 들어가니 몸도 따뜻해졌다.
"저기 저 부부가 먹고 있는 음식이 맛있어 보이네. 이거 먹고 저 음식 사 먹을까요?"
그 음식을 어디서 파는지 살펴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 잠깐 사이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 잠시 후 남편은 기름 범벅인 감자전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이는 남편 특유의 성격이 또 나왔다.
"당신이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지."
"어휴, 전혀 다른 음식이잖아요. 이거랑 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같아요?"
"같은 음식인 줄 알았지. 그냥 먹어."
할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기분은 가라앉았다.
다시 거리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또 다른 크리스마스마켓이 보였다. 브라타슬라바에도 크리스마켓이 여러 군데였다. 크리스마스 관련 장식물 설치도 한창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여행이었다.
비엔나로 돌아갈 때는 기차가 아니라 플릭스 버스를 예약했다는 남편 말에 플릭스 버스 정류장은 어디냐고 물었다.
"시내 어디서 타겠지. 나도 여기 처음 왔는데 어떻게 알아"
"그러면 버스 타는 곳 확인하고, 마음 편하게 아직 구경하지 못한 곳을 돌아봐요."
"뭐 하러 그렇게까지... 알겠어."
남편은 구글 지도를 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골목을 지나고 길을 건너 한참을 걸었다. 구시가지를 벗어났는지 널찍한 도로에 높은 현대식 건물들이 나타났다. 평범한 여타 대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어디까지 가야 해요?"
"조금 더 가야 해."
"아니, 구시가지에 있다면서..."
"내가 처음인데 어떻게 알아. 조금 더 가야 해."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리도 아프고 지쳤다. 거기서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가 구경하고 오기에는 시간도 여유롭지 않았다.
"버스 타는 곳이 구시가지라고 하더니, 다시 구시가지로 가서 구경할 수 있겠어요?"
"되돌아가서 구경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지."
"이렇게 먼 줄 알았으면 확인하러 안 왔지."
"아니, 버스 타는 곳 확인하자고 하더니 왜 딴소리야."
"봐야 할 것들 제대로 구경도 못했는데..."
"네 확인 병이 도져서 이렇게 된 거잖아."
버스 터미널이 있는 커다란 쇼핑몰에서 옥신각신했다. 남편은 쇼핑몰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나도 화가 치밀었다. 지도를 검색하니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관광 명소인 파란색 예쁜 성당이 있다고 나오길래 씩씩거리며 나섰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걷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참 걷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감정도 가라앉고, 사라진 내가 걱정되었는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어디야', '같이 가야지'라고 말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가던 길을 되돌아와 남편과 함께 파란 성당을 구경하러 갔다.
구시가지 구경은 시간상 어렵고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쇼핑몰을 잠시 둘러보고 음료를 사 마시며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주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구시가지로 들어서더니 버스 정류장에 정차했고 대거의 관광객들이 올라탔다. 구시가지 구경하고 구시가지에서 버스 타면 되는 거였다.
"아까 이곳에 플릭스 버스도 정차할 것 같다고 하니까 네가 이 지역 버스 정류장 같다고 했잖아."
남편은 또 내 탓을 했다. 버스 티켓에 나와 있는 사항을 꼼꼼하게 확인하지도 않고 나에게 티켓을 공유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더 이상 다툴 힘이 없어 입을 닫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4시 10분 버스를 타고 비엔나로 무사히 돌아왔다. 국제 버스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면 갈아타지 않고 바로 집까지 갈 수 있어 편하게 도착했다. 하지만 브라티슬라바 기념 자석 하나 사 오지 못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