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드로잉 배우며 두 달 살기
드로잉 수업시간에 '제스처'라는 것을 배웠다. 드로잉을 시작할 때 그리고자 하는 것의 세세한 것 신경 쓰지 말고 전체 윤곽을 살피고 큰 부분부터 그려야 한다. 대충 이런 뜻인 것 같았다.
손목을 사용하지 말고 팔꿈치를 쓰라고 하는데 처음 하는 동작이라 영 불편했다. 혼자 그릴 때는 안 되지만 수업 시간에는 강사의 지적과 지도를 받으며 팔꿈치 관절을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연필도 글씨 쓸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잡으라는데 역시 어려웠다. 비엔나에 와서 처음으로 목탄을 써보았는데 목탄을 쥐니 연필을 잡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손동작이 가능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니 재미있었다. 수강생이 몇 명 안 되니 언어는 잘 안 통해도 일일이 개별 지도를 받을 수 있어 좋았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스승이 필요한 법이다.
비엔나 외곽에 있는 미술 용품을 파는 대형 매장 Boesner를 몇 차례 구경 갔다. 미술 용품의 세계는 끝이 없었다. 연필류, 파스텔, 수채, 아크릴, 유채, 수채, 도화지, 캔버스를 비롯해 잡다한 여러 미술 용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침을 흘리며 구경했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탐이 났다. 굳이 살 필요가 없는 미술용품이라고 경고하는 이성과 사고 싶다는 감정(욕망) 사이에서 내적 갈등이 심하게 일었다.
Boesner는 대형 매장이라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을 뿐 할인점은 아니었다. 물건은 정가를 그대로 다 받았다. 할인해서 파는 한국에 비해 싸지 않고 아니 오히려 비싼 것도 많았다. 일단 비엔나 미술 수업에서 필요한 목탄과 필통만 사서 돌아왔다.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은 많지만 특히 미술 수업에서 강사가 가지고 있던 더웬트 잉크텐스 색연필을 갖고 싶었다. 검색하니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제품이라도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살까 말까를 매일 고민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무척 망설여졌다.
갈등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남편은 웃으며 필요하면 가격 따지지 말고 사라고 부추겼다. 비엔나에서 사용한다면 한국보다 비싸게 샀어도 비싼 게 아니라는 말에 힘을 얻고 Boesner로 향했다. 잉크텐스 색연필 앞에서 다시 망설였다. 72색은 욕심인 것 같고, 36색은 색이 부족한 듯했다. 고민하는데 남편이 다가오더니 100색을 사라며 제일 좋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힘입어 72색을 샀다.
그렇게 말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묵직한 잉크텐스 색연필을 들고 나오는데 올라간 입꼬리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정가를 다 주고 샀지만 나중에 세금을 환급받아서 우리나라에서 할인받고 사는 것과 비슷했다.
집에 돌아와서 사고 싶어 적어 놓았던 미술 용품 목록을 슬그머니 버렸다. 잉크텐스 색연필을 사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이것저것 갖고 싶던 욕망이 사라졌다.
비엔나에서는 작은 종이에 그림을 많이 그려서 잉크텐스 색연필을 자주 사용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수채화와 아크릴화를 주로 그리느라 색연필은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긴 고민 끝에 샀던 72색 잉크텐스 색연필은 본래의 역할을 잃었다. 색깔마다 담긴 비엔나의 추억을 되새기는 기념품이 되어 서랍 안에 고이 모셔졌다.
여행이란, 삶이란 그런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