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드로잉 배우며 두 달 살기
비엔나 하이킹 코스 10 근처에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어 하이킹 후 쇼핑센터를 구경하기로 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다. 비 맞는 거야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출발점에서 사진 찍고 출발했다. 10코스는 산이 아니고 평지길이었다.
도장 찍는 곳이 하이킹 책자의 지도에 잘못 그려져 있어 헤맸다. 남편이 비엔나 시청 앱에서 다운로드한 하이킹 지도에 나와 있는 주소를 따라가니 도장 찍는 곳이 나왔다. 근처 카페는 동절기라 운영하지 않았다.
가볍게 걷기를 끝내고 쇼핑센터에 갔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 대충 구경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유는 생각 안 나는데 남편과 작은 언쟁을 했다. 감정이 예민해져서, 식당가를 돌아다니며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일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참고 있던 남편의 사소하지만 못마땅했던 점들도 되살아 났다. 내 퉁명스러운 말에 남편 역시 화가 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남편도 나이가 드니 더 잘 삐지고 성질도 잘 낸다.
집으로 돌아오니 배가 몹시 고팠다. 무언가 먹으려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주섬주섬 챙겼다. 남편은 그때까지도 화가 안 풀려 안 먹겠다고 했다. 억지로 끌어 식탁에 앉혔다. 우리 싸움은 끝났다.
부부 싸움은 그냥 그렇게 마무리한다. 살아보니 남편과 깊은 대화를 하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고 체계, 정서, 대화방식이 모두 다르다. 그냥 행동을 함께 맞추며 일상생활을 해나간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기. 이게 우리가 사는 방법이다. 성향도 다르고 소통도 안되는데 별문제 없이 사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저녁에 장보고… 하루가 또 지나갔다.
우리나라 계엄 관련 기사를 보고 유튜브 보다 보면 시간이 더 후딱 지나갔다. 마음은 심란했다.
다음 날은 비엔나 하이킹 코스 4를 걸었다. 구글 지도에 시작점이 잘못 나와서 거리를 왔다 갔다 헤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친절하게 4코스 출발점을 알려주었다.
하이킹 코스 4가 그동안 걸었던 코스보다 훨씬 맘에 들었다. 적당한 산도 오르고, 마을도 구경하고, 작은 호수도 보고, 강도 따라 걷다가 건너기도 했다. 거리는 짧지만 알차게 걸은 기분이었다. 또 안개가 낀 숲길은 환상 적고 몽환적이었다. 언제 내린 눈인지 눈도 쌓인 곳도 있었다. 현실이 아닌 세상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걷고 나니 이래저래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비엔나 하이킹 코스를 걷고 도장을 모으기로 했던 것은 정말 잘 한 '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