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드로잉 배우며 두 달 살기
미술 수업에서 강사는 조명을 조절하고 식물 화분을 여러 개 배치하더니, 식물 화분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고 했다. 식물 화분을 그린 같은 도화지 한 장에 매주 한 단계씩 작업을 추가하며 그림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의 수업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인이었던 강사의 너무 유창한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그렇게 그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어는 전혀 못알아 듣고)
한 주가 지난 수업시간에 새로 배운 방식으로 그려야 하는 줄 알고 지난 시간에 그렸던 것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 내내 지우느라 고생했다. 한참 지우는데, 강사는 그렇게 지울 필요가 없다며 지난 시간에 그린 것 위에 새로운 작업을 추가하는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맥이 빠졌다. 지우기 시작할 때, 진작 이야기해 주지…. 그림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맥 빠진 기분은 바로 회복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영어 실력 부족, 질문하지 않는 습관, 남의 말에 지나치게 예민함, 나의 모든 게 싫게 느껴졌다.
의욕 상실로 아무것도 안 한 덕분에 몸은 늘어지게 쉬었다. 푹 쉬고 나니 마음에도 힘이 다시 생겼다.
집 근처 사설 학원에서 했던 수업은 마무리되었다. 학원에서 메일이 와서 열어보니 강사의 사인과 내 이름이 박힌 수료증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이 수업은 누드 드로잉이었는데 비엔나에서 받았던 수업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레오폴트 미술관
우리나라에서 비엔나 1900이 진행 중이고 레오폴트 미술관에 있는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 한국으로 갔다는 기사를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레오폴트 미술관으로 향했다. 클림트와 에곤쉴레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한국으로 간 그림은 티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여러 다양한 그림을 보며 클림트와 에곤 쉴레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클린트의 '키스'는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지만 클림트와 에곤쉴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은 꼭 가봐야 한다.
사실 레오폴트 미술관은 클림트와 에곤쉴레 그림보다 1900년대 전후 비엔나의 여러 그림, 가구, 옷, 공예품이 등이 전시된 곳이다. 시대별로 전시해 놓아 비엔나 예술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루돌프 베터의 그림이 여러 전시실에 걸쳐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기법으로 영역을 넘나들며 추상적인 그림과 드로잉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그림도 아주 많았다. 뛰어난 실력의 화가라는 게 느껴졌다.
전쟁 장면을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많은 그림에는 전쟁을 겪은 화가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조형물과 그림을 보고 지하로 가니 패턴 전시가 있었다. 옷감이나 커튼 가구 등에 들어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패턴들이었다. 재미있고 관심 있게 보았다.
볼 것이 많아 미술관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중간에 카페에 들러서 점심을 사 먹으며 쉬기도 했다. 레오폴드 미술관은 볼 것도 많고 사람도 적당해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방문했던 여러 미술관이나 박물관 중 레오폴트 박물관이 가장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를 걸으며 구경했다. 어느 좁은 골목에도 작은 크리스마스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맛있는 와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먹을 것을 파는 상점보다는 공예품이나 장식품 등 소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비엔나 크리스마스마켓의 특징이다.
큰 광장의 화려하고 거대한 크리스마스마켓도 좋지만 작은 골목 구석에 있는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마켓도 분위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이런 곳은 관광객이 별로 없어 복잡하지 않아서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