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경 Jan 05. 2024

언니 자랑

다시 시작되는 봄을 위하여

나에게는 세명의 언니가 있다.

맏이의 숙명을 타고나 언제나 묵묵하게 아낌없이 퍼 주는 큰언니,

지혜와 재주를 타고나 우리 집 대소사에 선장 격인 둘째 언니, 

다정다감한 천성에 참새 방앗간역을 맡고 있는 어여쁜 셋째 언니가 한 가지에서 자랐다.


각지에 흩어져서 살다 보니, 어릴 적에는 몰랐던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피어났다.

병원신세를 지게 된 동생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쪽잠을 자며 병실을 지켜준 언니들,

삶의 파고에 맥없이 무너지던 순간들을 가슴 아파하며 함께 울어주던 언니들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네 자매 우리끼리는 뭐든 잘 통한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알아챈다.

모 난 것은 숨겨주고 빈자리는 채워주며, 나서기를 주저하지만 힘든 일은 앞 다투어 자처한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약속 지키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고,

김치 하나만으로도 맛있게 먹는 소박하지만 똘똘한 입맛 하며, 

안분지족의 근면 성실한 습관이며, 겉과 속이 같고, 빈말 못하는 것까지 쌍둥이처럼 닮았다. 

여태껏 나이만 먹었지 허술하기 그지없는 동생을 한결같이 보듬어주는 언니들 자랑은 한도 끝도 없지만, 

왠지 우리 둘째 언니 얘길 꺼내면 마음 한 구석에 멍울이 진다.



둘째 언니는 홀로 뚝 떨어져 가장 먼 곳에 산다.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생면부지인 곳에서 맨손으로 터전을 일구고, 

금쪽같은 아들딸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모두 어엿한 사회인으로 배출하고서,

이제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거라며 당찬 포부를 밝힌 터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내 손을 붙잡고 너거 언니를 가리키며 

'쟈는 머리가 매우 영리하니 어야든지 공부를 꼭 시키라'며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때 촌에 살림살이가 뻔했다 아니가, 

겨우 입에 풀칠도 근근하면서 살았는데 돈 나올 구멍이 어디 있었노,

너거 오빠 대학 보낸 것을 갖고도 없는 살림에 쓸데없는 공부시킨다고 동네에서 난리였다 아니가, 

밑으로 너거들 줄줄이 커 올라 오지, 

한 명도 가당찮게 힘들던데 둘씩이나 대학 시킬 형편도 안되고 해서 너거 언니는 대학을 못 보냈다 아니가,

여태 그게 좀 맺힌다."

미안한 마음을 에둘려서 표현하시던 아버지에게도 조용히 눈물을 삼키며 듣고 있던 둘째 언니에게도 

다 지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통한이 맺힌 씁쓸한 가난의 역사다.   



우리 둘째 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던 폐쇄적이고 가난했던 농촌의 최대 피해자였다.

오빠랑 둘째 언니는 하필이면 두 살 터울이라서 그 피해가 직접적이고 막심했던 것 같다.

옛날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아들에게 양보하고 차별받았던 후남을  연상하면, 

둘째 언니가 감내해야만 했던 삶의 무게가 어땠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오빠 가는 길 얼쩡대지 말고 빨리 비켜서라, 오빠 그림자도 밟지 마라, 동생한테 무조건 양보하라'며

엄마는 유독 둘째 언니에게 냉정했다.


언니가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때까지만 해도 체구가 자그마하니 나무젓가락 같았던 우리 언니)

가방이며 교복이며 모두 큰언니 것을 물려받아 

누리끼리 변색한 블라우스 소매를 몇 번이나 둥둥 접어 올리고,

치마허리가 사정없이 돌아가는 마대자루 같은 낡은 교복을 걸치고 다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블라우스만이라도 새것으로 사 달라고 그렇게 졸라 됐건만 엄마의 묵살뿐이었다고. 

육성회비를 못 내어 교내방송을 타며 교무실로 불려 가, 언제 낼 거냐는 선생님의 거센 닦달에 상처받았다고. 

'우리 반 부반장은 얼마나 가난하길래 회비도 못 낼까'라는 반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고.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데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 오빠 손에 먼저 쥐어 주고, 

언니는 늘 뒷전이었다고, 그래서 더 서글펐다고.

 

고등학교 때는 

엄마가 '니는 대학 못 보내준다'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하여 일찌감치 대학의 꿈을 주저앉혀 버렸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별도로 편승된 취업반에서  

주산, 부기 등 각종 자격증을 준비하려는데 경제적 지원이 안 따라주니 마음이 무너지더라고.

옆에서 길을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지, 보고 듣는 게 있어야 뭐라도 해봤을 텐데,

어찌하면 되는지 방법을 모르니 아무런 끈덕지도 없이 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월급을 엄마한테 다 갖다 바치며 오빠 뒷바라지를 하다가,

공부에 미련이 남아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했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더라고.

혼자서 뭐라도 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쳐 봤지만 손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허망했다고.


언니는 재주를 타고났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재주가 발하지 못했다.

깊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 없었으니 감옥살이를 한 재주가 너무나 안타깝다.

과거로 돌아가 인생역전해 볼 기회를 준다 해도 손사래를 치며 마다한다.

벗어나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매정했던 현실에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고,

우리 참 열심히 살았다며 삶에 달관한 언니다.

몹쓸 시대 같으니라고.......



둘째 언니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다 보면, 왜 갑자기 '빨강머리 앤'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지혜의 신이었다.

겨울방학 때 오빠가 사고를 당해 어른들이 모두 병원에 매달려 있었을 때, 

언니 혼자 집에 남은 올망졸망한 동생들과 소와 염소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했었다.

보살핌을 받아도 시원찮을 초등학교 6학년 비쩍 곯은 언니가 

머리를 굴리더니 어디에서 그런 번뜩거리는 해결책을 찾아냈는지,

소죽을 끓여 양동이에 퍼 담아 종종걸음을 치며 몇 번을 번갈아 오가면서 외양간 소죽통으로 나르고,

새벽에 밥을 하여 사랑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여 묻어둔 밥통을 꺼내 저녁까지 먹게끔 밥을 양분하고,

땔감나무 나르기, 마당청소, 방청소 등 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분담 짓고, 

군불을 지퍼 가마솥에 물을 데워 동생들 따뜻한 물에 세수하게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를 하였다. 

어른들이 내놓고 간 숙제를 차근차근 풀어내는 의연함에 나는 언니를 닮고 싶었다.

'우리 둘째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뭐든 잘하나' 

언니만큼만 언니처럼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언니를 좇으며 살았다.


둘째 언니는 엄마가 소홀히 대하는 일들을 슬기롭게 챙겼다.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 했는데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동생이 울먹이자,

급하게 선물을 꾸려 산타할아버지가 바깥에 두고 갔다며 동생의 웃음을 되찾아 주기도 하였다. 


어설프고 서툴었던 배움의 길에서, 어디에 물어볼 곳 없는 막막한 곳에서, 처음 겪는 당혹스러운 날에

차오르는 떨림을, 차디찬 두려움을, 쓰디쓴 곤욕을 차분히 진정시키며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구원의 손길이 절박했던 그 자리에 항상 언니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언니와 함께 라면 콩이 절로 메주가 되고 장이 되니, 걱정은 먼발치 기둥에 동여매놓고 길을 나섰다.


언니의 손가락은 금 손가락이었다.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참머리'라 불렸던 내 머리카락을 요리조리 만지더니 

한 갈래, 양갈래, 옆갈래로 이쪽저쪽 바꿔가며 땋아서 당시 핫했던 '디스코 머리'를 선보였다.

동네 사람들, 심지어 미용사 언니마저도 내 머리모양을 보고 누가 그래 예쁘게 해 주더냐며 반색을 하였다. 

책에 나온 것을 대충 보고서 뜨개질로 벙어리장갑, 목도리, 조끼, 스웨터를 뜨서 입어라며 던져주질 않나,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면서 슬쩍 한 번 훑어보고 할 뿐인데,

언니의 가녀린 손가락에서 휘뚜루마뚜루 오만가지 신기한 물건들이 탄생되었다. 

손끝이 얼마나 휘황찬란하던지 언니가 만들어 온 물건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생신날즈음에 언니가 전화를 돌려 우리 네 자매 한 번 모이자고 하였다.

나는 일주일 전에 고향에 다녀와서 또 가기가 망설여졌으나, 한동안 얼굴도 못 보며 지냈던 터라

멀리서 내려온 언니 이때 아니면 언제 보겠나 싶어 아이들 다 떼어 놓고 홀가분하게 혼자서 친정으로 갔었다.

50여 년을 살면서 우리 네 자매가 엄마를 가운데 두고 처음으로 한 방에 누웠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이 올 때까지 이야기는 끝날 줄도 모르고 오손도손 화기애애 내 생애 최고의 밤이었다. 

애잔하게 흔들리는 부모님의 눈빛을 뒤로하고 버스를 타고 나오면서, 

저마다 벅차올랐던 지난밤의 기억에 상기되어 

우리 다음번에도 곁가지 다 떼어놓고 우리 자매들끼리만 모이자며 굳은 약속을 했건만, 

세월이 야속하게도 지켜지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잊지 못할 가슴 뭉클했던 밤을 선물해 준 둘째 언니,

언니의 전화 한 통에 달려가 

아들바라기였던 엄마의 시선이 처음으로 딸들을 향해 열린 추억 한 장 얻었으니, 

내게 너무나 완벽했던 하루, 그날 전화해 준 언니가 고마울 수밖에는......

 


항상 오빠가 최우선이었던 우리 집에서, 

아들에게 밀려난 우리 딸들이 저마다 엄마에게 서운했던 감정들이 있었다.

오빠랑 가장 많이 얽히고설켰던 둘째 언니는 딸이라서 엄마에게 외면당했던 시간들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며 복잡한 속내를 간혹 털어놓는다.

아들들 일에 늘 언니를 앞장 세워 가시더니 엄마는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메마른 말로 깊은 우물을 파 놓은 체 서둘러 별이 되어버렸으니 그 마음 오죽할까나.......


오빠한테 치이고 동생들한테 치이고 중간에서 우리 언니 참 많이 고생하였소.

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란 찬란한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 서려 있다오.

서러움이 북받쳤던 나날들의 아린 기억들을 할 수만 있다면 이 동생이 다 지워주고 싶다오.


언니야, 삶의 재미도 모르고, 아등바등 앞만 보며 쉼 없이 달렸던 우리 이제 봄날만 생각합시다.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준 고마운 우리 언니, 지혜로운 우리 언니, 어여쁜 우리 언니,

매일 아침 30분간 하는 영어공부도 재밌고 신난다는 우리 언니,

남은 날 서로 아껴주며 즐겁게 삽시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dear Sister, Happy birthday to you.

Life partners, my best Sisters!!!

Be happy, Be happy, Be happy.



작가의 이전글 뒤양간 도서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