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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Dec 27. 2023

뒤양간 도서관

박씨전을 처음 만나다

내 이름 석자만 겨우 쓰는 것을 익혀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아마 한 달여를 ㄱ,ㄴ,ㄷ,~ ㅏ,ㅑ,ㅓ,ㅕ,~ 를 네모칸 공책에 쓰고 외우며 한글을 깨쳤던 것 같다.

처음에는 떠듬떠듬 글자가 읽히더니 이내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눈은 언제나 글자를 탐색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젯날 아침에 동네를 돌며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시라 전할 때,

이웃집 마당에 슬쩍 들어서면 찰나에 눈이 멎는 이색적인 풍경이 있었다.

장독대옆 화단에 작약꽃이 만발했던 집, 

대문 오른쪽 옆으로 대나무밭이 푸르게 펼쳐졌던 집,

안채 마루가 높이 있어 우러러 보였던 집, 

싸리나무로 담을 둘렀던 집, 

마당에 티끌 한점 없이 정갈했던 집,

마루에 앉아서도 동네가 훤하게 내려다 보였던 집, 

그리고 복숭아 밭이 있었던 친구의 집까지 하루 종일 눈앞에 아른거렸다.

밤이 되면 베개를 베고 누워 

이른 아침에 눈여겨보아 둔 공간을 살며시 집으로 데려와 머리맡에 펼쳐두고

여기저기 옮겨보고, 다시 물리고, 해체하고, 옆집 담을 와장창 허물며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감행하였다.

독특한 공간, 감성적인 공간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단숨에 나를 사로잡는 공간, 머물고 싶은 공간, 우리 집에도 나의 최애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뒤양간이었다.

박물관 같기도 하고 보물창고 같기도 했던 우리 집 뒤양간은 

안채에서 뒷돌담까지 슬레이트 지붕으로 길쭉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높이 치솟는 햇빛은 가리어지고 좌우로 소통되는 그늘진 바람길이 시원하게 뚫려있어,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히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칙~,칙~,칙~, 처그덕 처그덕, 척척척' 새벽을 열고 밤을 닫는 엄마의 가마니 짜는 소리가 

뒤양간을 향해 나 있던 안방의 쪽문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잠결에 거친 선을 간간이 그어 되었다. 

사시사철 뒤양간의 가마니틀은 밤늦게까지 자장가를 불렸고 새벽에는 수탉보다 먼저 알람을 울렸다.


부엌을 돌아서 들어가는 뒤양간 좌측 입구에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틀이 있었다.

엄마 옆에서 눈과 손을 바들거리며  

새끼틀 한쪽 나팔에 꼬리에 꼬리가 물리도록 간추린 짚 두어 가닥을 넣으면서 새끼 꼬는 법을 배웠다. 

한 번 해보고 두 번 해보고  세 번, 네 번....... 

어느샌가 혼자서 발로 밟아 돌리며 양쪽 나팔입구로 번갈아가며 짚을 먹이는 것이 수월하게 되었다.

새끼틀이 손안에 들어오니 우쭐해져서는 

괜스레 최대속력에 도전하다 손과 발이 아차 하여 중간에 새끼줄이 툭 끊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이제 스그락스그락 비비고 비벼, 끊어진 새끼줄을 이어 붙이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여름에는 그동안 뒤양간에서 숨죽이고 있던 맷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둥글게 둥글게 묵직하게 돌아가더니 돌틈으로 되직하고 뽀얀 콩국물이 배시시 삐져나왔다.

봄에는 떡메가 뛰쳐나와 

휙~착 휙~착 하늘 높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넓적한 돌판에 올려진 쑥떡뭉치를 내리치더니 

금방 비취색 쑥가래를 눈이 휘둥그레지게 빚어내었다. 

가을에는 나무절구가 쿵쿵 콩콩 도토리 껍질을 신나게 두드렸다.

철마다 물건들이 뒤양간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제 쓰임을 뽐내었다.


5월에는 서까래에 감꽃을 환하게 매달고,

콩나물독에다 까만 보자기 덮여 수시로 콩나물을 기르고,

12월에는 동치미 항아리를 품었다.

세월에 얼마나 닳았는지 이빨 빠진 석작에 곶감을 담아 극진히 모시기도 했다.

뒤양간은 때가 되면 말하지 않아도 제할 일을 알아서 척척 했다.


전기불의 등장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호롱, 

언니 오빠의 손 때 묻은 헌책들, 

이름도 모르는 쇠붙이 연장들이 뒤양간으로 퇴장하였다.

뒤양간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새 시대에 밀려난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우리 집 뒤양간은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보관하였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나는 뒤양간 놀이터로 갔다.

무엇이 있나 보물 찾기를 하듯 두리번두리번, 뒤적뒤적, 

이건 뭐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가? 

아직 내가 하기에는 무리인 엄마의 가마니틀을 만지작거려 보고, 

흔들어보고, 맛보고, 물 만난 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담벼락에 기대어 한가득 쌓여 있던 헌책무더기를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흠, 책' 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읽기'라는 인지의 새로운 수단이 장착되니  

호기심이 발동하여 눈으로는 책제목을 쓱 훑고, 손으로는 책내용을 쭈르르 넘겼다.

'이건 언니 거, 이건 오빠 거, 어~ 이건 뭐지?' 

초록색 표지에 박씨전, 신윤복이라는 까만 글자가 나의 눈을 훅 끌어당겼다.

문자를 습득한 나에게 드디어 문명세계가 열린 것이었다.

박 씨의 재주에 놀라고, 

신윤복의 미인도에 흠뻑 빠져 

틈만 나면 나는 엄마의 가마니틀 앞에 죽치고 앉아서 책을 붙들고 있었다.


읽고 읽고 또 읽다 보니 즐겨찾기 부분까지 생겼다.

박 씨가 허물을 벗고 우아한 정경부인으로 거듭나는 장면과 

요술을 부려 기고만장한 용골대를 벌벌 떨게 하던 장면을 무한 반복하여 읽었다.


난생처음 미인을 보았다. 

미인도의 미인은 진짜 미인이었다. 

엄지가 척 올라갔다. 

'우와 예쁘다!!!' 어린 내 입에서 감탄사꽃이 활짝 피어나고 머리에서 형형색색의 불꽃이 아름답게 수 놓였다.

미인도를 펼쳐 놓고 신윤복의 재주를 흠모하며 삐뚤빼뚤 따라 그려도 보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책장을 넘기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계속 눈을 박고 있었다.

몇 년간 쌓인 책먼지가 들숨 날숨에 들락날락하여 간질간질 재채기가 터져도,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고 있으니, 케케묵은 먼지 다 닦아 먹고 앉았다고 기겁을 해 되어도, 

미세먼지가 아주 높으니 안전사고에 유의하라며 연일 시끄럽게 울려대는 안전 안내 방송에도, 

책에 진득하게 빌붙어 있었다.

 

재밌냐 물었다.

말이라고, 천 번 만 번 물어봐도 내 대답은 한결같으니 그만 묻고 읽어보라 답했다.

나는 뒤양간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박씨전 덕분에 사그락 사그락 책장 넘기는 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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