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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Feb 05. 2024

밥상머리 대화

우물 안 개구리의 혼돈

"우와! 비주얼이 개쩐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응, 그래, 엄마가 남은 재료로 응용해서 해 봤는데 어떠니?"

"어~ 맛있어!"

"가게 메뉴로 내어도 괜찮겠어"

  "아들, 요즘 뭔 단원 공부하니? 물어보는 게 없는 걸 보니 쉬운가 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엄마, 졸업 전시회에 쓸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메모를 해 두긴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천천히 생각하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을 거야 "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오늘도 깨끗하게 비워줘서 고맙다"


이것은 현재 우리 집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다.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서 쌓인 한풀이를 하듯,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은 어떤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핀 진달래꽃 따 먹던 그때 그 시절, 

우리 집은 너무나 조용한, 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족이었다.

다 차려진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긴 침묵 속에 헛입맛만 다시며, 

서로 눈이 마주치면 멋쩍어하면서 천장 한번 쳐다보고 밥상 한번 쳐다보며 눈알을 떼굴떼굴 굴렸다.

사랑방에 계신 아버지 언제 건너오시나, 아버지 빨리 자리에 앉아 수저 들기만을 기다렸었다.

아버지 밥 한 술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신호로 하여, 밥상머리에서는 수저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밥풀떼기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싹싹 긁어먹어야 했다.

스뎅 밥그릇은 밥풀이 들러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을 떼어낸다고, 숭늉을 묻혀 숟가락 뺑뺑이를 돌리며 무진장 애를 썼다.

국그릇의 국물 한 방울이라도 남기면 난리가 났다.

한 번은 도저히 배에 들일 곳이 없어서 국물 진짜 딱 한 방울 남겼었는데, 

우리 아버지 '훌러덩 마신 던가 안 하고 그걸 남겼다'며 정신이 얼얼하도록 야단을 쳤다. 

그 후론 '국물이 남으면 어떡하지' 하는 극도의 불안감에 국을 적게 퍼달라고 하거나 아예 먹지를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게 식사를 이어가다가도 갑자기 우리 아버지 숟가락을 턱 내려놓으면 일제히 얼음이 되었다.

음식의 간, 온도, 구성 등 조금이라도 마땅찮지 않으면 밥상이 마당으로 날아가고, 벽에 부딪히고,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더니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정확히는 몰라도 딱 그 짝이 아니었을까 싶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집 양은 밥상 다 찌그려져 온전한 것이 없었다.

천장까지 반찬 국물이 튀어 안방 벽지는 늘 알록달록한 색들로 물들여져 있었다. 

걸레로 아무리 닦아도 울긋불긋하게 염색된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칸디스키' 영접한 적도 없으신 분이 뜨거운 추상화를 어찌 그리 잘 그리시던지......  


국은 화씨 212도로 팔팔 끓여 밥상에 놓았을 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야지만 합격점을 주신다.

열전도율이 높은 스뎅 국그릇에 손을 대었다 떼었다, 국그릇을 들었나 놓았다, 

몇 번을 견주다 큰맘 먹고 옮기는데도 너무 뜨거운 나머지 그만 국그릇을 잘팍하게 엎어버렸네.

하면 그것 하나 다담바시 못한다고 책망을 하시어, 

화상을 입고도 주눅이 들어 아무 말 못 하고 죄지은 듯 가만히 있었다.

간은 간간무리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우리 입에는 적당하니 좋기만 한데 조금이라도 싱겁다 싶으시면, 

숟가락을 '탁' 내리치고 눈을 부릅뜨고 잠자코 계시면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간장을 대령해야만 했다. 

식사시간에 얼마나 까탈스럽게 구시던지 평화로왔던 적이 있기는 했었나 싶다. 



아버지 눈짓 하나로 기침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세상이었다. 

우리 6남매 눈치코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아버지 눈에 최대한 거슬리지 않도록 숨 죽이며,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 걸으며 긴장감속에 살았다.

중간에 엄마의 통역을 거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엄마 역시 대화는 굵고 짧았다.

먼발치 아버지 발소리 들릴라 싶으면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정자세로 앉아 있고, 

'흠'하는 엄격한 기침소리 맨땅에 닿기도 전에 

주위를 살펴보며 상황을 파악하여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바로 시작해야지, 1초 꾸물거렸다간 사달이 났었다.


아버지 바깥일 하고 오실 때  대문이 활짝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가 소릴 듣고 뛰쳐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지게 작대기로 대문만 꽝꽝 두드리고 계셨다.

미처 소릴 듣지 못해 늦게 나가면 늦게 나왔다고 난리, 이도저도 온통 난리통에 기죽으며 자라다 보니, 

늘 아버지는 무섭고, 어렵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날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쩔쩔맸었다. 

'철천지 원수라도 괜찮으니 제발 아무나 누구라도 빨리 집에 들어오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 할 뿐이었다.

대문 소리에 귀를 박고 있다, 

첫 타자로 들어오는 애먼 사람에게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냐'며 애꿎은 쌍심지를 켰었다.


그러시던 우리 아버지 요즘 딸 온다고 밥상 차려 놓고 기다리시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하다.

세상에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우리 아버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라 이빨 다 빠지고 새로이 두벌이 나는 것 같아 신기할 따름이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날 밤이었다. 

평소에 엄마, 남동생, 나 이렇게 한 방에 몰려 자니, 나는 독립적인 내 방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무 아낀다고 불을 넣는 둥 마는 둥 하여 선득선득한 작은 방에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솜이불을 깔고 덮고 이것저것 한다고 홀로 고요한 밤을 축내고 있었다.

"미경아, 미경아" 나를 부르는 인기척에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 마당에 서 계시는 게 아닌가.

동네친구가 감기에 걸려 며칠을 결석했었는데 병문안 가려한다며 친구집 안내를 부탁하셨다.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혀 있던 우리 동네는 4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한 해그림자가 몰려와서 

이내 암흑천지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여 안골목에 있던 친구집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친구부모님이랑 한방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친구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아재의 무르팍에 턱 걸터앉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할 만큼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게 뭔 일이람, 아직 미열이 있다더니만 쟈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네!'라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아재 반응 또한 천지가 개벽할 정도였다.  

친구의 열없는 응석을 다 받아주는 아재의 행동에 무겁게 내려앉던 눈꺼풀이 놀라서 껑충 위로 달라붙었다. 

오냐오냐 하며 친구를 어르고 달래는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처음 보는 믿기지 않은 광경에 입이 얼어붙었다. 

우리 아버지 같았으면, ( 우리가 그럴 일도 없지만, 정신줄 놓은 척 치고 객기를 부렸다고 가정한다면)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구냐'면 청천벽력 같은 고함 소리 십리 밖으로 달아났을 터인데.......

보고 있자니, 자리가 자리인지라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과 동시에 기분이 참 오묘했다.

시간이 점점 새까맣게 지쳐가건만 미적미적하며 궁둥이를 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선생님이

"다 큰 아이가 어디 그래 앉아 있냐, 아버지 힘드시겠다, 바닥에 내려앉아라" 라며 한마디 하셨지만,  

방을 나설 때까지 친구는 그대로 궁둥짝을 제 아버지의 무르팍에 딱 붙이고 있었다.


우리 앞집 구멍가게 앞에서 선생님은 삼십여분 거리에 있던 학교 주변의 거처로 올라가시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발걸음이 무겁게 휘청거렸다. 

우리 집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던지라 

이율배반적인 문화에 충격을 받아 녹다운되어 몇 날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었다.

"언니야, G가 말이야....... 언니야, 나 살면서 처음 봤어, 

 언니야, 우리 어린 동생도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언니야, 아재가 말이야......"

다들 우리 집처럼 살지 않는구나, 우리 아버지 같지 않구나, 자식들에게 곰살맞게 하는 아버지도 계시는구나!

여태, 세상 아버지가 다 우리 아버지 같은 줄 알았으니, 나는 참! 흑!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혼돈을 지독하게 앓고서 

내가 만약 어른이 된다면,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아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잘 헤아려주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적어도 밥상머리에서만큼은 아이들과 유쾌하게 소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의 다짐을 잘 실천하고 있냐면 '늘 공부하며 집중하고 있다'이다.

식탁에 앉으면 감사함만 존재케 하라는 나의 밥상머리예절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는 아이들과

하나의 음식이 완성되기까지 거쳐 온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기리며, 일용의 양식에 감사하고, 즐긴다.

덧붙여 일상적 관심사나 사회 이슈나 개인적인 고민이나 바람을 주거니 받거니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24년 차 엄마임에도 여전히 버벅대며 완벽하진 않다.

그래도 귀 기울이며 열린 시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상히 여겨 후한 점수를 주는 우리 금쪽이들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에게 배우며, 때로는 으르렁대며, 아옹다옹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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