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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Feb 01. 2024

내 사랑 게발

저녁노을꽃이 핀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을 기념하며 조그마한 게발꽃 화분을 하나 샀었다.

그것이, 간간이 들여다보며 물만 주어도 무럭무럭 자라나 

게발이 세발 되고 네발 되어 발의 수를 점점 점점 제곱배로 불려 나가는데, 이야~ 참! 희한한 물건이었다.

잎을 솎고 솎아내 여러 화분에 옮겨심기를 거듭하였더니 어느새 나의 정원은 게발천지가 되어갔었다.

봄가을로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큰아이가 고 3이었던 가을에 꽃망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그 해의 달이 차오르자 한껏 부풀린 꽃봉오리를 톡 톡 터뜨리며 꽃 피움도 절정으로 치달았었다.


남향집이었던 우리 집은 앞뒤로 막힘이 없이 탁 튀여, 하루 내내 태양의 은혜가 모이는 보배로운 곳이었다.

겨울이면 보드라운 햇살이 거실을 타고 들어와 건너 건너 따사로운 발끝을 부엌에 까지 쭈욱 뻗혔다.

햇살봉 잡기 놀이, 햇빛수에 발 담그기, 지칠 줄 모르는 햇빛 놀음에 늘 웃음이 묻어났었다.

아지랑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베란다에 나가 앉아 아이들과 일광욕을 즐겼다.

눅눅한 기분은 세안을 한 듯 뽀송뽀송한 얼굴로 바뀌며 이내 맑아졌다. 

태양이 공짜로 준 따뜻하고 향기로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아이들도 나도 마냥 싱글벙글하였다.

동이 트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방안에 스며드는 햇빛과 동시에 울리는 지지배배 새소리에 눈을 뜨며 

보람찬 하루를 시작하였다.



첫째 아이가 수능고사를 친 후 이사를 하였다.

베란다 확장공사가 된 새 아파트는 화분 둘 곳이 여의치 않았다.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 같은 존재들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키 크고 무거운 화분들은 정리해야만 했었다.

게발의 엄마 격인 화분과 함께 고르고 골라 기념비적인 화분 몇 점만 데리고 왔다.

이사 온 곳은 남서향으로 지난번 살았던 곳보다 층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에워싼 높은 그림자에 가려져 해구경을 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나마 거실에서 높고 귀하신 해님 맞이가 가능하였는데

그마저도 오후에 잠시 해가 들어와 1시간 남짓 선걸음으로 있다가, 

간다는 소리 소문도 없이 훌쩍 사라져 버렸다.

튼실한 팔을 넘실거리며 화려하게 춤추던 식물들이 하나둘 시들시들 고개를 떨구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갖은 보약 다 먹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식물도 사람도 햇빛을 쬐야만 단단해짐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이토록 빨리 무너질 줄이야........

턱없이 부족한 일조량의 피해는 예상했던 것보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루를 빨래로 시작하는 주부인 나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왔었다.

오랜 시간을 빨래 건조대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빨래가 마르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반응하였다. 

빨래에 달라붙은 심드렁한 퀴퀴한 냄새를 견디다 못해 빨래 건조기를 구입하였으나 이 또한 말썽을 부렸다.

설치할 때는 아무 이상이 없던 것이 기사님이 가시고 나면 오작동을 하였다.

출고된 지 따끈따끈한 제품 3대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같은 이상을 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잇따른 AS와 교환 요청을 해야 했던 나도 믿기지 않아 폰으로 촬영을 해 증거영상을 남겼었다.

급기야 서비스 전문 대응팀에서 부장님이랑 기사님이 함께 오셔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건조기뿐만 아니라 전기설비 등 집을 샅샅이 훑었지만 끝끝내 뭐가 문제인지 밝혀 내지 못했다.

결국 환불을 받는 것으로 매듭지었고 나의 세탁소는 흐지부지 운영되었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한 줌의 햇살을 들이는 것도 마지못해 허락하는, 1년 365일 하루 온종일 희끄무레한 안방에 있으면 

반지하에 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지하로 지하로 끝없이 추락하였다.



봄이 오기를 기다린 지 다섯 해가 되었다.

사람도 식물도 주어진 환경에 또 적응하는지 

다행스럽게도 지난해부터 게발은 여리기는 했지만 꽃을 서너 송이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집은 다른 건 몰라도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 하나만큼은 실컷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집으로 돌아갈 때면 거실창에 저녁노을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나의 황혼도 저와 같기를 소원하며 경이로운 하늘에 감탄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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