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경 Jan 16. 2024

저기요, 기사님

뜻밖의 귀인

1990년대 일이다.

오전 수업 중에 학적 관련 긴급 전달 공문이 송부되어 갑자기 출장을 가야 했다. 

수업 시간표를 조정하여 남은 차시 수업을 앞당겨 숨 돌릴 틈도 없이 연달아 보강을 다하고서, 

황급히 채비를 하여 교무실을 나섰다.

"이선생, N교육청 가는 길은 알아요?" 사려 깊은 교감 선생님의 물음에 택시를 타고 갈 것이라 답했다. 

위치도 모르거니와 시간 내에 도착하러면 이것저것 따지고 갈 겨를이 없었다. 

촉박한 시간에 시계를 영거 푸 쳐다보며 허둥지둥 학교를 빠져나갔다.



마침 택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에 섰다. 

행선지부터 묻는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말하니 모른다며 쌩하고 가버렸다. 

뒤이어 바로 택시가 왔다.

급하게 택시에 오르니, 기사님은 뒤에서 다 보고 있었다며, 

'물어보고는 말이지, 운전하기 힘든 곳이면 바로 내빼버리고 말이지, 편한 길만 고집하는 저런 인간들 때문에 택시기사들이 욕을 먹는다' 며 막무가내로 앞의 택시 기사님을 힐난하게 비판하였다. 

1초도 아까운 속절없는 마음에도 기사님의 강경한 발언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직업 소명의식이 투철해 보였던 기사님은 어디를 가시기에 승차 거부를 당했냐며 친절하게 행선지를 물었다.

그런데 어떡하나 이번 기사님도 모르신단다. 

'그곳이 어디쯤 있냐, 주변에 알만한 건물이라도 없냐'는 둥 되려 내게 물었다.

'내가 알면 택시를 탔겠냐고요' 저도 초행이라 모른다고 하니, 기사님은 적극적으로 위치 탐색에 나섰다.

일단 도로를 쭉 타고 나가 우리 학교 주변에서 벗어났다. 

그러고선 기사님의 머리에 있는 지도를 펼쳐 아는 곳은 'X' 자 표시를 하고 있을 만한 곳으로 진입하였다.

신호대기 중에 창문을 내리고 경적을 울리며 소리쳐 옆 운전자님들에게 물어보고,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춰 세워놓고 물어봤지만 모두가 금시초문이라 하였다.

이도저도 알 길이 없자 조급해진 기사님은 '그럼 공중전화기 앞에 내려 줄 테니 위치를 알아 오라' 하였다.

이러다가 제때 갈 수는 있으려나 속 타는 마음에 이내 가방을 열었는데 지갑이 없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뒤적뒤적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돌발 상황에 나타나는 나의 전매특허 증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굳어지는 석회화 현상이 발생했다. 

 

어떻게든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겠기에 

"저기요, 기사님, 제가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두고 나왔어요, 음~ 죄송합니다만, 아~~ 정말 죄송합니다만,

기사님, 돈 좀 빌려 주세요, 되돌아가는 차비까지 빌려주시면 기사님 통장으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사정을 말하였다. 

기사님 황당한 표정으로 기가 차다는 듯이  흘깃 보시더니, 

'통장으로 넣으면, 집에 계신 안방마님 여자이름 찍힌 것 보고는 집안꼴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으니, 

그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며 나중에 학교로 찾아가겠다'라고 하였다.


택시요금, 공중전화요금 그리고 돌아가는 버스비까지 합쳐 총 5000원 치의 돈을 택시 기사님에게 빚지면서 겨우 제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N교육청에 도착하였더니, 모양 빠지게 특수학교는 해당사항이 아니란다. 

이번 입시설명회는 일반학교 대상으로 하는 거라며 공문이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하였다.

기껏 물어물어 고생고생해서 찾아왔더니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일이람.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맥이 풀려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버스는 언덕을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도 따라 가파르게 시소를 탔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지나던 길에 들렀다며 택시 기사님이 학교로 찾아오셨다.

나는 10000원을 기사님께 드리며 "그날 정말 감사했습니다" 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이자를 쳐서 빌린 돈의 갑절을 드려서인지 기사님은 겸연쩍게 웃으며 가셨다.



임용고시 원서를 접수할 때부터 본교육청만 왕래했었다.

특수학교는 본교육청 소속이라서 다른 지부 교육청에 가 본 적도 없거니와, 웬만해선 가 볼 일도 없었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조막만 한 마을에서 점점 더 판이 커지는 넓디넓은 세상으로 전입신고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변 지리를 익히는 것이었다.

초임시절, 이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까칠했던 교육현장에서 도시의 해부도를 그릴만 한 여유가 없었다.

어디를 가려면 무엇보다 지리가 제일 큰 난공불락거리였던 나는

혼자서 낯선 길을 나설 때에는 도착할 때까지 무사안일기도를 하며 다녔다.

일반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꼭꼭 숨어 있던 N교육청을 처음 찾아가던 길은 비록 험난했지만,

나는 위기의 순간에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곳곳에 뜻밖의 귀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세상의 모든 귀인님,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꾼에게 길을 묻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