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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Jan 18. 2024

공개 재판

교사의 능력

3년 차 되던 해에 고 3 담임을 맡았었다.

우리 반은 기존 중학부에서 올라온 아이들, 고등부에 이르러 다른 특수학교에서 온 아이들, 

그리고 일반학교에서 온 아이들 해서, 

다양한 구성원만큼이나 각기 개성도 차고 넘쳐 개교 이래 역대급으로 자유분방했었다.

최고 학년이 된 아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보아 온 학교의 비열함에 치여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교 행사에 매번 반 아이들 전체가 똘똘 뭉쳐 무조건 반대의사를 표명해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체부자유 특수학교에서 다른 학급과는 달리 특히나 이동이 자유로왔던 우리 반 아이들은 

길거리와 화장실 소식통으로 끊임없이 적색주의보를 울러 대었다.


우리 사회가 잘한 것은 묻어도 꼬투리 하나 잡으면 눈덩이처럼 굴려 이상한 방향으로 모는 경향이 있지 않냐.

그간 여럿 제보를 바탕으로 매일같이 조종례시간에 내가 천리안이 있어 다 알고 있으니, 

학생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내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속닥속닥 반상회를 거친 후 

스쿨버스로 하교하지 않고 자유로운 보행권을 이용해 방과 후에 거리를 야심 차게 활보하고 다녔다.

하루는 퇴근길에 건강한 청소년상에 위배되는 행동을 눈앞에서 목격하였다.

다음날 체육시간도 아닌데 수업시간 1시간(40분) 내내 근력강화운동으로 지구력과 인내력을 다지게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교장 선생님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있는 내가 이런 일로 흐린 날이 지속되면 

너희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지 않냐고, 제발 부탁한다며 너희들에게 천만 개의 눈과 귀가 쏠려있으니, 

이 학교를 다니는 이상은 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선생님을 어여삐 봐 달라'라고 통사정을 하기도 하였다.

누구보다 힘든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무엇이든 터 놓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며 도원결의를 제안했었다. 

반항과 설득의 과정이 반복되는 바람 잘날 없는 날들을 보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두툼하게 쌓여 우리는 서로의 뒤를 지켜주는 끈끈한 전우애를 발휘했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실없는 교사의 행동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저희들끼리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소위 교사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무서운 아이들이다.


수학여행 때 김현식의 골목길을 유창하게 부르던 우리 반 반장 G가 어느 날 슬며시 다가와서 하는 말이 

'지금껏 학교를 다니면서, 중학교 때 여자선생님 한 분과 그리고 현재 지금 담임을 맡고 있는 나만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정표를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심으로 대해주신다'라고 하였다.

내 뒷담화는 절대 안 하다기에,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야단을 쳐야 할지, 뭐라 답하기가 그랬다. 

내 언행의 반사판이 된 아이의 말에 '내가 바르게 길을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여태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했다.

G는 대학교를 진학하고도 가끔씩 전화하여 이런저런 달콤 살벌한 세상사 얘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 신학기가 되면 일 년에 한 번은 꼭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는다. 

되도록이면 학교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학부모 상담주간이 도입되었을 때 상담신청을 하여 학교에 가면 의아해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우리 아이가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어 선생님께 감사 인사차 왔습니다'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묻지 않아도 학교생활을 정밀묘사하여 나에게 준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은 '즐겁게 보내'라는 말이다.

하여 나에게 학부모 상담은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한 학교생활을 선사해 주시는 선생님들의 헌신과 사랑에 대한 답례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는 '얼굴도 모르고 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불편한 송사에 휘말리게 된다면, 

서로에게 낯 뜨거워서 안 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학교 방문에 대한 동의를 반드시 구한다.


큰아이가 초6학년 때, 저녁에 학부모 연수가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2명이 큰아이 반에서 참석했었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시더니 '참석해 주셔서 이렇게 기를 팍 팍 살려주시니 감사하다'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안다.



새 학기에 학부모 총회날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반에서 적어도 1명은 참석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우리 반에서는 아무도, 그 어느 학부모님도 참석할 수 없다고 하셨다.

오실만한 여건이 되시는 어머님들이 하필 그날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참석이 불가피하다고 하시니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여기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내 편하자고 하는 아쉬운 소리는 절대 못 꺼내는 외골수다.

 학부모님들의 자발적인 참석이라면 모를까, 

굳이 독촉전화를 하여 학부모님들께 부담을 안기면서까지 나의 안위를 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첫 해, 초에 부친상을 입은 학생의 집으로 문상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사회의 끝자락으로 한없이 내몰려 있는 

우리 어머님들의, 우리 학부모님들의, 우리 아이들의 치열한 삶터를 봤었다.

그래서 어머님들이 이고, 지고, 든 무직한 굴레에 나까지 나서서 보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총회가 있던 날 오후, 직원체육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교사실에 있던 나를 체육관으로 불렸다.

소파에 앉아서 하시는 말씀이 

'어찌 이선생 반만 학부모가 한 명도 안 올 수 있냐, 이선생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라고 하였다. 

학교 행사에 동원된 학부모 인원수로 교사의 능력이 평가되는 현실에 내심 씁쓸하였다.

문제는 그다음 날 직원회의 시간이었다.

교장 선생님 서두가 '나'였다.

'담임이 어찌하였기에 학부모가 어떻게 한 명도 참석 안 할 수가 있냐'며 갑분싸 연설을 하셨다.

공개비판을 받고 있던 나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기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무덤덤했다.

다만 학부모님들의 처지에 상관없이 절대적 기준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반감만 커져갔다.

암울한 적막을 깨고 초등교무부장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학부모가 왜 학교에 안 올러고 하겠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오면 0 내라고 하니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하시며 교장 선생님의 말을 막아섰다. 

그 말에 혀를 질린 듯한 교장선생님, 

나를 질타하던 입이 머뭇거리며 무대 뒤로 쑥 퇴장하고 직원회의가 엉성하게 급마무리 되었었다.


우리 학교는 초, 중, 고등부 학생들이 함께 다녔다.

학년별 반별 모든 것들이 천차만별이었다.

초 6학년 반에서도 학부모가 한 명도 아니 참석하였지만, 

그 반 선생님에게는 교장선생님이 먼저 교실로 찾아와서 걱정스레 학부모의 안위를 물어 오더라 하였다.

총회 참석차 학교 오던 길에 아주 아주 매우 경미한 접촉사고가 있었다 했지만, 

참석 안 할 걸 가지고 한쪽은 걱정으로 나는 빈축을 쌌으니, 참 아이러니 했다.



교사의 능력은 무엇으로 판단되는가? 

졸업을 하고 이듬해 유쾌하고 건실한 J가 자신도 엄연한 직장인이라며 음료수를 사 들고 학교를 찾아왔다.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들께 J 자랑을 하며 한 병씩 쭉 돌렸더니, 

연차도 짧은데 멋진 제자를 뒀다는 선배 선생님의 말에 으쓱했었다.


4년을 끝으로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였기에 감히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교사는 학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학생이 있기에 교사가 있다'

'교사와 학생은 상호 보완적 관계이자 서로 윈윈 하는 관계이다'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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