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과 아버지

포도주 한 병을 받은 날. 골방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by 숨결마다

나는 꽤 자주 선물을 받는 편이다.

삶의 끝자락에 있는 환자, 그리고 그 가족들이 소중한 마음을 담아 건네는 선물들.


때로는 고맙고, 때로는 송구스럽다.

나는 그저 책임을 피하고,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의사로서 최소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적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

거기에 더해 환자에게 선물까지 받는다는 것이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나는 과연, 그분들이 주시는 정성만큼 진심을 다하고 있는가.



오후 진료가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외래를 다니시는 어르신, 그리고 종종 함께 오는 아드님. 출장이 잦은 그는, 외래에 올 때마다 빈손인 적이 없었다.


이번엔 멀리 조지아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며, 일부러 스탈린이 좋아했다는 포도주를 챙겨 오셨다.

“못난 직업을 가져서 외국 출장이 잦아요. 자주 못 와서 미안하고, 항상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못난 직업, 골방, 그리고 외진 한 번 제대로 못 가는 나의 현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아버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안부를 나누는 사이지만, 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버지는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던 여자를 내가 데려왔고, 결국 결혼했지만 그리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진 않다.

그 모습들을 아버지는 너무 가까이에서, 지나치게 오래 지켜보고 있다.


처음에는 나도 나름 괜찮게 살았다. 하지만 조금 느리고,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를 가지면서 삶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지치고, 나는 나대로 힘들었다.

서로에게, 또 각자에게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모자라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는 부모님.



오늘 점심시간이 떠오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푸른 하늘 아래 둥실둥실 떠다니던 구름.

적당한 습기를 품은 바람.


꼭 초등학교 운동회 연습하던 날,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꼈던 그 공기와 닮아 있었다.


달라진 건 시간뿐이었다.

그만큼, 내 모습도 바뀌었고, 아버지의 모습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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