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의 존재
나는 신의 존재를 생각할 때마다 늘 두 개의 문 앞에 서게 된다.
한 문은 의심으로 향하고, 다른 문은 질서로 향한다.
이상하게도 그 두 문은 서로 반대 방향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가보면 같은 복도에 이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핸드폰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내 손, 내가 기대고 있는 침대, 지금 이 순간조차도 혹시 꿈은 아닐까.
우리는 보통 눈앞에 보이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생각보다 허술할 수 있다.
인간은 착각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고, 환상을 현실로 오인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나씩 의심하다 보면, 결국 눈앞의 세계는 단단한 바닥이 아니라 안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끝까지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의심하고 있는 나다.
세상이 가짜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그 가짜를 의심하고 있는 어떤 의식은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사물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묻는 나 자신이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토록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내가 존재한다면, 이 존재의 근원에는 더 단단하고 더 완전한 어떤 바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나를 가능하게 하는 더 상위의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은 신을 감정적으로 찾는 태도와는 조금 다르다.
외로워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심의 끝에서 남는 존재의 뿌리를 찾다 보니 신이라는 개념에 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내가 고개를 든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신화로 설명했다.
대낮에 해가 사라지는 일식을 보고 거대한 짐승이 태양을 삼켰다고 믿었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 짐승을 쫓아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진실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지식이 없던 시대에는 신의 자리가 넓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곧 신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안다.
일식은 괴물이 아니라 천체의 운동이다.
벼락은 분노가 아니라 전기적 현상이다.
병은 저주가 아니라 원인과 기전을 가진 생물학적 사건이다.
과학은 신을 죽였다고 말하기보다, 신이 차지하고 있던 무지의 빈칸들을 하나씩 지워왔다.
그렇다면 아직 설명되지 않은 현상들 역시 언젠가 자연의 법칙 안에서 밝혀질 일들일 뿐, 섣불리 신의 흔적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이 지점에서 나는 신을 비판하게 된다.
세상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신이 그 법칙을 마음대로 깨뜨린다는 것은 이상하다.
중력을 무시하고,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고, 필요할 때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라면 그는 전지전능하다기보다 오히려 체계를 흔드는 예외처럼 보인다.
반대로 신이 그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는 법칙 아래 놓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전지전능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여기서 신은 두 가지 곤란한 모습 중 하나를 취하게 된다.
법칙을 못 깨는 신은 제한된 존재처럼 보이고,
법칙을 마음대로 깨는 신은 일관성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고 법칙을 만들고 유지하기만 하는 신은 더 이상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인격적 신이라기보다, 거대한 시스템의 관리자나 설계자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신’이라는 단어는 조금 낡아 보인다.
그것은 경배의 대상이라기보다, 구조의 배후에 있는 원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에서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살아 있다.
한 목소리는 말한다.
모든 것이 의심 가능할 때에도 끝까지 남는 존재의 근원은 단순한 물질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고.
불완전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완전한 바탕의 가능성을 가리킨다고.
다른 목소리는 말한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을 갖다 붙이는 것은 오래된 습관일 뿐이라고.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한, 기적을 행하는 인격신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고.
나는 어느 한쪽을 쉽게 승자로 선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를 완전히 부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은 과학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는 힘 역시 종교적 언어만으로는 대체되지 않는다.
하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묻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묻는다.
질문이 다른 만큼, 전쟁처럼 보이던 둘은 사실 서로 다른 층위의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진짜로 거부하는 것은 신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지나치게 인간적인 신,
화를 내고, 편을 가르고, 필요할 때마다 법칙을 깨며 개입하는 신을 믿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끝내 놓지 못하는 것도 종교적 확신이 아닐 수 있다.
이 불완전한 존재 뒤에 어떤 더 깊은 근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오래된 질문일 뿐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내게 신이란 무엇일까.
기도를 들으며 기적을 베푸는 존재라면 나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
혹은 우주의 질서와 존재의 바탕을 동시에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나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다.
결국 내가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신 개념이 내 사유 앞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문제다.
모든 의심 끝에서 신을 만날 수도 있다.
모든 설명 끝에서 신을 잃을 수도 있다.
혹은 그 둘의 끝에서,
인간이 너무 쉽게 ‘신’이라 불러버렸던 어떤 더 깊은 질문만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아직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신을 믿는 일도, 신을 의심하는 일도 결국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보다,
내가 존재를 어떤 깊이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