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을 강요받고 싶지 않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기억력이 안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화를 기억하는 것이 관심이고, 그 관심이 곧 존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너는 기억을 잘 못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이 전부 내 탓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나온 많은 대화는 감정의 배출로 시작해 상황을 나열하고, 공감을 요청한 뒤, 결론 없이 흘러가곤 했다.
반면 나는 대화에서 구조와 맥락을 찾고 싶어한다.
무슨 의미였는지,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결국 무엇을 선택하면 좋을지.
내가 원하는 건 ‘흐름’이 아니라 ‘이해’에 가까웠다.
대화의 목적이 다르면, 기억되는 방식도 달라진다.
내 뇌는 어쩌면 스스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나중에 꺼내어 쓸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래서 저장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래서 나는 ‘기억하지 못하면 무례하다’는 프레임과
‘내 이야기를 하나하나 저장해주는 게 배려다’라는 강요 같은 존중을 조심스럽게 거부하고 싶다.
기억을 요구하는 순간, 대화는 관계가 아니라 채점이 되기 쉽다는 걸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으니까.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이 하나 있다.
기억이 아니라, 표식이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건 모든 디테일을 전부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화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그날의 핵심 하나.
“그때 네가 제일 힘들어했던 건 그 부분이었지.”
이렇게 한 번만 짚어줘도 관계의 온도는 달라진다.
나는 이제 완벽한 기억보다,
상대의 마음에 남는 핵심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선택한, 더 부드러운 방식의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