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간지 <여기> 55호 등단 수필
소나기가 날카롭게 창문을 두드린다. 소나기란 원래 갑자기 내리기에 우산을 준비 못한 사람은 당황스럽다. 시계를 보니 아이의 하교 시간이 멀지 않았다. 부랴부랴 우산을 가지고 교문 앞으로 간다. 소나기 내리는 오후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는 모습. 이것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엄마의 행동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우산을 들고 오신 적이 없다. 소나기가 내리는 하굣길에서 나는 항상 엄마를 기다렸다. 저 멀리 교문에서 엄마가 우산을 들고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지나가는 소나기라며 비가 그치길 기다려도 보지만, 강철못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는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집으로 달렸다.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소나기는 신기하게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멈춘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도 했었다. 소나기는 그쳤어도 나는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강철비는 나의 몸도 젖게 했지만, 나의 마음에도 단단하게 박혔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거의 안 계셨다. 엄마는 논에 일하러 가셨다. 한편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구석에 남아 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집에 계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원망을 가득 담아 하소연한다. 그러나 엄마는 나의 하소연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셨다. 고작 그 거리(500m)를 비맞고 온 것이 무슨 대수냐 하셨다. 나는 더 화가 났다. 텔레비전에서처럼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러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오는 일은 그저 드라마의 이야기 일뿐이었다.
이런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소나기가 싫다. 가끔 비 오는 날에 비를 맞고 걸으면 기분이 좋다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절대로 동감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만으로 온몸이 섬뜩하게 차가워진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면 비가 그치길 기다리든지, 아니면 우산을 사든지 한다. 절대로 비를 맞고 걷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 일부러 비를 맞고 걸은 적이 한번 있다. 그건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날의 일이었다. 요가를 하고 나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요가 학원에서 우산을 빌려도 되지만 왠지 그날은 비를 맞아야했다. 남편에게 시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비에 쫄딱 맞은 옷가지를 현관에 벗어두고, 욕조에 앉아서 뜨거운 물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남편이 들어오다가 보란 듯이 현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젖은 옷가지를 보고 놀랐다. 십 수 년의 결혼생활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에 남편이 당황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지만, 그날은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보다 차가운 비의 느낌에 더 이상 비를 맞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요즘은 일기예보가 하루가 아니고 시간 단위로 나온다. 아이 학교를 보내기 전에 일기예보를 검색한다. 선크림을 바르게 할지, 우산을 가지고 가게 할지 하루의 날씨를 챙긴다. 참 좋은 세상에 산다. 그러나 가끔 오전에 그친다는 비가 오후까지 이어지던가,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내릴 때면 당황스럽다.
서둘러 우산을 가지고 간다. 내 아이에게는 비를 한 방울도 맞히지 않겠다는 마음뿐이다. 두 발이 빠르게 나를 학교로 데려다준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700m이다. 소나기 내리는 날의 700m는 7km의 거리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는 종이 울리기 전에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쉰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아이의 모습이 보이길 기다린다. 그때 내 마음은 행복으로 충만하다. 이렇게 소나기에 한이 남아있는 줄은 몰랐다.
지금은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농사일에 바쁜 엄마가 아이들 셋을 비올 때마다 데리러 갈 수는 없었을 게다. 비에 젖으나, 노느라 땀에 젖으나, 엄마 눈에는 똑같지 았았을까. 내가 아이를 키우다보니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을 때가 많다. 서운하게 남아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나의 육아와 겹쳐서 희석되었다. 엄마를 이해하고 원망하지는 않지만,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그 아쉬움을 남겨줄 수는 없다.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유년기는 목구멍의 칼과 같아서 쉽게 뽑을 수 없단다.’ 엄마인 나왈 마르완이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에게 남긴 유언장의 시작이다. 어렸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 어른이 되서 예기치 못하게 아픔을 줄 때가 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그 기억은 순식간에 나를 후빈다. 그날의 일은 형태도 없이 사라진 듯 해도 뇌 주름 어딘가에 숨어서 호시탐탐 나를 괴롭힐 기회를 엿본다. 무서운 녀석이기에 그 녀석을 영원히 보내야만 한다. 방법은 치유뿐이다. 그 일들을 영원히 잊기 위해서는 다른 좋은 기억으로 덮어줘야 한다. 절대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차가운 비를 맞던 생쥐꼴의 기억은 이제 없다. 이제는 비를 맞으면 단지 뒤처리가 귀찮을 뿐이다. 소나기가 내리면 오히려 반갑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나도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다. 나를 반갑게 기다리는 아이를 보며 우산을 내민다. 아이도 웃고 나도 웃는다. 나란히 걷다보면 비가 그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