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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어서 좋았던 휴가

거제 지심도에서

by 방수미

장마와 태풍과 무더위의 여름이 지나간다. 매미의 소리는 작아지고 귀뚜라미 소리는 커졌다. 여름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항상 아쉽다. 가을이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 년의 끝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을 보내려니 오래전에 갔던 지심도가 생각난다. 지심도는 동백섬이라 불릴 정도로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펴서 아름답다. 언젠가 봄에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지심도에 갔다. 소문처럼 동백나무 숲은 우거졌고, 나무마다 동백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섬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기지로 사용되어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날 지심도에 머문 시간은 두 시간뿐이었다. 배를 타고 돌아 나오면서 아쉬움에 계속 지심도에 눈길을 보냈고, 언젠가 길게 머무르겠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남편이 지심도 꼭대기 민박집 풍경이 예뻤다며 사진을 찍어왔다. 그해 여름 그 민박에서 5박 6일의 여름휴가를 보냈다. 민박 몇 개, 식당 몇 개, 커피숍 한 개가 전부인 지심도. 식단을 짜고 거기에 맞는 준비물을 챙겨서 섬에 들어갔다. 긴 시간이라 심심할까 걱정돼서 책도 챙기고, 바닷물 놀이를 위해 수영복도 챙기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의 환상 모험 같은 휴가는 시작되었다.

첫 번째 모험은 바닷물 놀이였다. 이름처럼 전망 좋은 꼭대기에 있는 민박집에서 몽돌해변까지 20여 분 걸어 내려와야 한다. 해변 관광지가 아니라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했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도착하고 보니 물이 너무 맑다. 맑은 물속에 고동과 홍합이 가득했다. 우리는 나뭇가지, 폐스티로폼 등을 엮어서 타며 신나게 놀았다. 따뜻한 바위에 누워 햇볕도 쬐고, 고동과 홍합도 땄다. 너무 재미있게 놀고 민박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길이라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바다에 가서 놀았다. 마치 무인도 표류기처럼 바다에는 우리뿐이었다.

두 번째 모험은 지심도 산책이었다. 한여름의 지심도에는 동백꽃이 없지만, 우거진 동백나무숲은 밀림 그 자체였다. 지심도를 동과 서로, 남과 북으로 다니며 산책했다. 밀림 밖은 탁 트인 전망대나 공원이 있어서 그곳에서 석양이 곱게 물들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또 곳곳에 있는 일본군 기지에 가서는 여기에 무서운 무기들이 쌓여있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아이들과 함께 나라 잃은 설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지어진 일본군 소장 사택이 지금은 커피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딱 봐도 일본식 가옥이다. 우리를 지배한 일본군인의 집에 앉아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아픈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아이러니하다.

세 번째 모험은 폐교에서 맘껏 뛰어놀기였다. 이 폐교조차도 일본군의 잔재이다. 일본군 병사(兵舍)였던 곳이 초등학교의 분교가 되었고, 지금은 그마저 문을 닫았다. 텅 빈 운동장의 주인은 작은 풀들이었다. 봄에 다녀온 기억에 구슬을 챙겨갔다. 내 어릴 적에는 대문 앞 골목에서 구멍을 파고 구슬 넣기를 했었다. 놀이 자체도 재미있었고 구슬이 늘어나는 재미도 있어서 매일매일 했었는데, 지금은 구멍을 팔 땅이 없으니 구슬 놀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졌다. 그러나 구슬은 계속 생산되며 여전히 문구점에서 팔린다. 구멍을 팔 수도 없고 금을 그을 수도 없는 구슬 놀이. 그저 관상용으로 집에 있었다. 추억팔이하던 구슬이 지심도에서 그 힘을 발휘했다. 아이들은 조그만 손가락을 움직이며 구슬을 툭 쳤다. 햇빛을 받아 구슬이 떼굴떼굴 굴러간다. 내 눈도 구슬을 따라 떼굴떼굴 굴러간다. 지심도 폐교에서 즐기는 놀이는 나와 아이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지심도 모험을 마치면 민박으로 돌아와 책도 읽고 보드게임도 하고 준비해 간 음식도 해 먹었다. 특히 바다에서 잡아 온 고동과 홍합이 제일 맛있었다. 한여름이지만 덥지 않았고,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전망 좋은 곳에서 즐기는 여유는 행복이었다.

5박 6일은 짧았다. 매일 반복되지만, 매일 다르게 펼쳐지는 하루에 매료되었다. 진정한 힐링을 지심도에서 했다. 아마 제주도나 유명 관광지였다면 빡빡한 일정을 짜서 빈틈없이 구경 다녔을 것이다. 관광도 좋지만, 이런 작은 섬에서 누리는 여유는 더 좋다. 하루하루가 모험이었다. 거제도에서 배로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간다. 우리의 길에는 우리만 있다. 오로지 우리 가족뿐인 곳. 바다도 민박도 폐교도. 해야 할 것 없는 하루는 서로에게 충실하다. 아이들 노는 것을 바라보고, 남편의 얼굴도 바라본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지심도의 시간은 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환상의 섬에서 나가면 우리는 또 빠르게 걷는 여행자가 될 것이다. 사람의 습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에. 하지만 아무 할 일이 없는 여행이 주는 행복은 절대 잊지 않고 언제나 아껴놓은 불씨처럼 언젠가 다시 피우리라.


해마다 지심도를 찾자는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에 세 가족이 함께 다녀오고는 끝이다. 올여름에도 휴가를 지심도에서 보내기로 했지만, 휴가 날짜를 정하지 못하다가 급하게 캠핑을 떠났다. 마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음 심(心)을 닮았다고 하여 지심도라 불리는 섬. 지심도에 우리 마음의 불씨를 남겨놓고 왔으니 내년에는, 진짜 내년에는 꼭 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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