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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를 만납니다.

그리스의 아울리스와 뮈케네

by 방수미

『일리아스』를 만난 지 벌써 9년이나 되었다. 지인들과 책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일리아스를 읽은 후로 모든 사고와 행동을 일리아스에 근거해서 해왔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묻는다. “일리아스요? 나도 읽었는데 일리아스에 그럴 만한 내용이 있어요? 그냥 그리스신화 아니에요?”라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읽은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완역한 책이 아니라, 신화의 내용을 버무려 읽기 좋게 꾸몄거나 혹은 축약본일 가능성이 많다. 완역본 일리아스를 읽어보면 일리아스라는 서사시는 그리스신화가 아니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한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리아스는 문자도 없던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가 노래한 것으로 현존하는 기록물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일리아스가 만들어진 이래 음유시인들이 암송하며 전승한 200년과 문자로 기록되어 읽혀온 2600년을 합하면 2800년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고 읽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일리아스가 힘 있는 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아킬레우스는 고대 그리스인으로 그리스-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고 아카이오이족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부족으로 그리스 전체를 아카이오이족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모든 대작들이 그렇듯이 초반에 낯선 용어들이 많아 몰입하기 어렵지만, 시중에 있는 안내서들을 지팡이 삼아 읽어간다면 엄청난 성취감과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시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리아스는 한 인간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극복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인생에 교훈으로 삼을 만한 점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그리고 영화와 현대 문학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호메로스와 일리아스 책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전개방식이나 내포하는 사상이 일리아스와 닮아있어서 놀라곤 한다. 20세기 초까지 유럽 문인들의 스승은 호메로스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 문학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수준이 깊어짐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으로 유명하지만, 철학이 발달하기 전에 먼저 문학이 발달했고, 이야기의 힘이 철학으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나 비극은 끊임없이 인간의 운명과 오만과 절제를 주제로 한다. 오만은 히브리스 hybris, 절제는 소프로시네 sophrosyne, 미망은 아테 ate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격화된 이런 감정들을 숭배하며 오만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다. 일리아스는 오만과 절제의 대립이다. 여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는 끊임없이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도 오만함을 이기지 못한 끝에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잃었다. 인간의 아들인 아가멤논(그리스군 대장)과 헥토르(트로이 왕자)는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들의 모습은 승리가 보이면 오만해지고, 지고 있으면 실의에 빠진다. 일희일비하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다. 결국은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끝에 헥토르는 목숨을 잃었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하지만, 마무리는 헥토르의 장례식이다. 이렇게 그리스 영웅이자 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에서 시작하고 트로이아 왕자이자 인간의 아들인 헥토르에서 끝난다. 균형감 있는 호메로스의 배치는 정말 탁월하다.

호메로스를 만난 지 8년째 2022년. 드디어 20여 일의 일정으로 그리스로 호메로스를 만나러 갔다. 그리스 고전에 빠져있는 우리 가족의 여행 동선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관광이나 풍경보다 『역사』나 『일리아스』를 찾는 여행이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설명하던 방벽, 성벽, 도시는 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렌터카를 천리마 삼아 그리스 본토를 달렸다. 본토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드디어 아울리스에 도착했다. 아울리스는 그리스 본토와 에우보이아라는 큰 섬 사이에 있는 항구인데, 바람이 적당해서 함선들이 출발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호메로스의 기록대로라면 1,186척이 트로이아로 출항했다. 내가 만난 아울리스는 아주 조용한 해변마을이다. 바다 건너에 에우보이아 섬이 길게 보였고, 저 멀리 수천 척의 함선이 떠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대문 밖에 나와 있던 할아버지가 흥미 있게 우리를 바라본다. 말이 통한다면 ‘여기가 일리아스에서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이 출발한 곳이라 찾아왔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리스 말을 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우리는 ‘황금이 많은 뮈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궁전에도 갔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고대 도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높은 곳에 완성된 도시가 있다니! 그것도 3,000여 전에 말이다. 그저 돌무더기가 있으려나 싶은 마음에 찾아갔으나 그곳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에 심취하여 트로이아라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 발굴했고, 그곳에서 진짜 트로이아를 찾았다. 탄력을 받은 그는 황금이 많은 뮈케네를 찾아 발굴을 시작했고, 정말 황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황금 장신구들은 모두 국립 아테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호메로스는 실제 그리스 본토 사람도 아니다. 그는 튀르키예(터키) 옆에 있는 키오스(그리스 영토)라는 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가멤논의 부유함은 에게해를 건너 키오스까지 전해졌나 보다. 일리아스에서 황금이 많은 뮈케네의 왕으로 소개되던 아가멤논의 부유함은 그의 무장 장면에서 잘 알 수 있다. 아킬레우스의 무장은 신의 광채로 되어 있다면 아가멤논의 무장은 온갖 번쩍이는 황금으로 가득하고 길게 묘사되어 있다.

일리아스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적절한 보상이다. 아킬레우스가 분노한 것은 자신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브리세이스라는 시녀를 아가멤논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보상은 명예의 문제이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오만함이다. 나는 일리아스를 읽은 이후에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적당한 보상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칭찬일 수도 있고, 간식일 수도 있고, 용돈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당연한 것들이 매시간 특별해졌다.


일리아스가 누렇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지만, 여전히 책을 펼치는 순간 새로운 호메로스를 만난다. 새롭게 다가오는 구절이 있고, 다시 보이는 영웅들이 있다. 그래서 매번 팝업북처럼 느껴진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오늘 밤에도 호메로스를 만난다. 옷소매가 낡고 너덜너덜해진 나의 스승은 오늘도 나와 만나기 위해 현대로 시간 여행을 오신다. 공손한 자세로 스승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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