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돌에 새겨진 이야기들

그리스 여행에서

by 방수미

그리스 여행은 돌과의 만남이었다. 그 돌들에는 나이가 있다. 청춘의 돌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었고, 노년의 돌은 크레테의 크노소스 궁전이었다.

수니온곶의 포세이돈신전

내가 처음 돌과 이야기를 나눈 곳은 그리스의 수니온곶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이었다. 많이 허물어진 포세이돈 신전의 나이는 2,500살이다. 포세이돈 신전은 석양이 물들 때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이다. 해 질 녘이 되자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돌에 걸터앉아 바다와 신전이 가장 아름답게 물들 때를 기다렸다. 나도 조각난 돌에 앉아서 신전의 도리스 기둥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욕심이 생긴다. 저 기둥에 손 한번 대봤으면. 하지만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대신에 신전과 가장 가까운 돌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7월의 돌은 따뜻했다. 해가 낮아질수록 신전은 황혼의 색에 물들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셔터를 누르며 그 순간을 영원히 남기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태양이 에게해 서쪽으로 풍덩 빠지고 나자 관리인들이 이제 나가라고 한다. 이곳의 퇴장 시간은 해가 진 후이다. 하늘은 이내 어둠이 내리면서 파래졌고, 어느새 반달이 낮의 태양을 대신하며 하늘에 떠 있다. 이제 모두 나가고 나면 덩그러니 남아있을 신전이 쓸쓸해 보인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를 쳐다보면서 나가는데, 신전의 기둥 사이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서 있는 환영이 보인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할 때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분주했을 그의 얼굴도 이제는 혼자만 남아 쓸쓸해 보인다. 느린 발걸음으로 느리게 걸어 나가며 신전과 이별할 시간을 조금씩 늦췄다. 그 후로 돌들은 나에게 특별해졌다.


유한한 생명을 얻은 인간은 백 년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돌들의 생명은 인간에 비하면 무한하다. 계속 그 자리에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 그들을 스쳐 가는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를 듣고, 자기 몸에 각인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바라듯이. 나는 그 누군가가 나이기를 바란다.

뮈케네 성문

그리스의 어디를 가든 내가 만난 돌의 나이를 먼저 계산한다. 나로부터 얼마만큼의 차이가 나는지 생각해 본다. 돌의 나이가 오래될수록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돌들이다. 젊은 돌들의 기둥은 매끄럽고 아름답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돌들의 종류에도 큰 변화가 있다. 3500년쯤 된 뮈케네는 거대하고 거친 돌을 다듬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리스가 지중해를 주름잡고 번성하던 시기에는 대리석이 유행하였다. 그 시기의 신전과 주랑과 아고라가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거기가 어디든 잠시 머물며 돌에 손을 얹고 눈을 감는다. 수천 년 된 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돌은 그리스어로 말할지 몰라도 소통에 문제는 없다. 느끼는 거니까. 그들의 말을 조용히 느꼈다.

아르고스 헤라신전

그리스의 신화를 찾고, 문명을 찾고, 역사를 찾는 여행은 이렇게 돌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더 특별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돌에서 나와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 만들어진 방벽인 이스트미아에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방벽을 쌓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함성이 들렸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관리도 되지 않는 그곳에서 말이다. 델포이에서는 아폴론의 무녀인 퓌티아가 가스에 취해 흥얼흥얼 신탁을 내리는 모습도 보았고, 아르고스 헤라 신전에서는 어머니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소가 되어 달려가던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의 모습도 보였다. 형제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형제를 칭찬하자 헤라 여신에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헤라 여신은 형제에게 영원한 잠을 선물로 주었다. 가장 명예로운 순간에 맞이한 죽음으로 그들의 명성은 영원하게 했다.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명성을 남기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선물인가 보다.

돌들과 함께한 20여 일의 시간여행은 빛의 속도로 지나갔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을 맞히듯이. 그렇게 날아간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현대로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여행의 끝을 향해 파리에 갔다. 파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거대한 철제 구조물인 에펠탑이다. 돌의 세계에서 철의 세계로 온 셈이다. 걸어서 산꼭대기 유적에 오르던 석기시대는 이제 없다. 철기시대에는 엘리베이터가 276m의 에펠탑 꼭대기까지 빠른 속도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해가 지면 모든 것이 밤에 갇히는 고대의 유적들과 달리 에펠탑은 밤에도 반짝반짝 환하게 자태를 뽐낸다. 심지어는 레이저 빛까지 쏜다. 현대에 온 것을 실감한다. 그런 에펠탑의 모습에 황홀함을 느끼면서도 낯설다. 나는 느리게 걷는 시간 여행자가 되고 싶은가 보다.


입추와 말복이 지난 부산 날씨가 화창하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장산이 보이고, 장산의 너덜겅이 보인다. 공룡이 살았다던 장산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석들이 생겼다. 그 돌들은 동결작용으로 더 작게 깨지고 깨졌다. 그렇게 돌들이 비탈을 이루었고, 그런 너덜겅은 장산에 여러 군데 있다. 너덜겅에 있는 돌들을 만져보고 싶다. 그 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줄지 듣고 싶다. 우리나라의 돌이니 우리말로 해주겠지. 더위가 꺾이고 나면 장산에 올라 너덜겅에 손을 대봐야겠다.


keyword
이전 17화돌과 물과 사람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