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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Nov 22. 2023

긴 의자의 추억

_영국으로의 시간여행

 산책길에 긴 의자가 보이면 잠시 발길을 멈춘다. 혹은 멈추지 않더라도 눈길은 오랫동안 긴 의자를 바라본다. 산책하다가 매일 만나는 긴 의자에서 나는 항상 영국의 긴 의자를 만나러 시간여행을 떠난다.     


 외국의 여배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쥴리아 로버츠이다. 『귀여운 여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그녀의 큰 키와 큰 입이 그리 매력 있지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녀는 참 멋있다. 영국 여행을 앞두고 『노팅 힐』을 다시 봤다.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는 내 심장을 녹였고, 쥴리아 로버츠가 걸었을 런던의 ‘노팅 힐’을 기대했다.    

코츠월즈
대영박물관의 키루스 실린더
<마이 페어 레이디> 촬영지 코벤트 가든
<노팅힐>에서 윌리엄의 집 대문
<나우 이즈 굿>의 촬영지 세븐 시스터즈

 영국에서 짧은 시간을 머물렀지만, 영국의 매력에 빠졌다. 영국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으로 종횡무진 다녔다. 피터 래빗을 만나기 위해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방의 힐탑을 찾았고, 어린 시절 달력에서 보던 큼직한 돌집을 보러 코츠월즈에도 갔다. 한참 피아노 수업에서 ‘런던 다리’를 배우고 있던 아이들과 함께 런던 브릿지에 가서 ‘런던 다리‘ 노래를 함께 부르고 노팅 힐에서는 영화 『노팅 힐』의 촬영지인 파란색 대문에서 사진도 찍고 서점에서 책도 두 권 샀다. 당시는 한참 페르시아의 초대 황제 키루스에 빠져있던 터라 ‘키루스 실린더’를 보러 대영 박물관에도 갔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일라이자가 꽃을 팔던 코벤트 가든에서 좋아하는 브랜드의 꽃무늬 원피스도 샀다. 런던에서 산 아이들의 캐드 키드슨 가방과 포트넘 앤 메이슨 홍차는 아직도 런던의 향수를 자극한다. 여행의 끝에는 런던을 벗어나 영화 『나우 이즈 굿』에 나왔던 브라이튼세븐시스터즈도 걸었다. 우중충하다고 소문난 영국 날씨는 우리가 있는 동안 구경하지 못했다. 하늘은 맑고 높았고, 공기도 쾌적했고, 우리가 가는 길에 햇빛은 따라다녔다. 오래된 호텔 카페에서 먹은 애프터눈 티도 좋았고, 피시 앤 칩스도 맛있었다. 영국식 민박에서 먹은 아침 식사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힐탑의 피터래빗 친구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영국 북쪽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였다. EBS에서 「피터  래빗」을 재미있게 보고 있던 터라 귀여운 토끼들을 보러 가장 먼저 힐탑에 가고 싶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3킬로미터쯤 걸어 힐탑에 도착했다. 베아트리체 포터 여사가 살았던 그 집은 지금 전시관이 되어 피터 래빗을 사랑하는 전 세계인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정원에 앉아 있으니 피터 래빗과 맥그리거 할아버지의 쫓고 쫓기는 모습이 보인다. 맥그리거 할아버지를 제치고 날랜 피터가 울타리 밖으로 잘도 도망간다. 베아트리체 포터 여사는 런던에서 태어나 작가로서 성공했다. 그런 그녀가 40대가 되어 런던을 떠나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방으로 이사 했다. 오래된 저택을 사들인 후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피터 래빗』으로 큰돈을 번 포터 여사는 근처의 땅을 사들이고 민박으로 개조하여 도시인들에게 쉼터로 제공했다. 그녀는 돈을 버는 대로 농토와 집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녀의 모든 재산을 환경단체에 기부한 후에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자연 그대로 둘 것’을 유언하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19세기에 머문 호수 마을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노팅 힐>을 따라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온 김에 좀 더 먼 호수에 가기로 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살았던 마을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비어있는 긴 의자를 보니 영화 『노팅 힐』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윌리엄의 다리를 베고 임신한 애나가 누워있는 한가로운 시간이. 영화를 따라서 나도 남편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영화 『노팅 힐』은 줄거리가 특별한 것은 없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영화 이야기는 버스가 올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햄스테드 히스의 긴 의자

 긴 의자의 추억은 런던에서도 연결되었다. 런던 도심 여행에 지친 피로를 풀기 위해 찾은 햄스테드 히스에서 긴 의자를 보았다. 햄스테드 히스의 긴 의자가 지금, 이 글과 추억을 소환한 것이다. 그 긴 의자는 1989년에 돌아가신 어느 노인이 기증한 것인지 영어로 이름과 생몰 연도가 쓰여 있었다. 그 뒤로 영국의 긴 의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와 누구의 결혼 등등 의자에 그들의 추억을 새겨 기증한 것들이 많았다. 그들의 멋진 문화에 감탄했다. 언젠가 나도 죽으면 이런 긴 의자 하나 남기고 싶어졌다. 나는 그 의자에 무얼 새겨 넣게 될까 궁금해진다. 나그네에게 잠시 쉼을 주는 의자라니. 떠나간 이도 머문 이도 좋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알고 보니 햄스테드 히스는 영화 『노팅 힐』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그 장면, 긴 의자에 윌리엄의 다리를 베고 애나가 누워있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그 뒤로 영화 『노팅 힐』은 더 특별해졌고, 긴 의자를 보면 영국과 영화 『노팅 힐』이 떠오른다. 마침 쥴리아 로버츠의 새로운 영화 『마더스 데이』(2016)의 개봉을 앞두고 있던 터라 런던에는 쥴리아 로버츠 사진이 가득 있었다. 빨간 이층 버스에도, 지하철 벽면에도 큼직한 쥴리아 로버츠가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빛처럼 빠른 시간여행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발길과 눈길을 사로잡은 긴 의자를 뒤로하고 다시 갈 길을 걷는다. 오늘도 오래된 추억 하나에 행복하다. 이번 주말에는 영화 『노팅 힐』을 다시 봐야겠다. 나의 ‘귀여운 여인 쥴리아 로버츠’의 환한 웃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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